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단 두마디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심각한 물음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어떠한 형태로이건 우리 모두의 심층의식 저변에는 이러한 문제가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있어서 인생의 의미는 보잘 것 없는 것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도 물어보지 못한 존재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돼지와 같은 자들은 인생의 아무 목적이나 의미도 갖지 못한 채 허둥지둥 돌아다니다가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킬만한 것들을 만나면 주워 먹기나 한다. 이것은 동물적인 사고 방식이다. 보다 고차원적인 인생은 삶의 이유를 궁구한다. “내가 왜 사는가?” 당신에게 이보다 더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또 있겠는가? 당신 삶에 있어서 진정한 성공이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아버지께서 내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요17: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애에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계획이 무엇인지 아셨으며 자기가 이것을 할 수 있음도 아셨다. 이것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 모든 인간은 여기에 우연히 혹은 어쩌다가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 생애 가운데 당신이 할 수 있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개인에게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주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눅22:42)
이 기도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진리를 가르쳐 준다. 먼저는 사람이 그 자신의 생애에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의 뜻을 갖고 있다. 둘째는 자기의 뜻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두 요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기도는 한낱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이와같은 선택에 직면한다. 모든 물음에 언제나 정답을 들려주는 한 현자의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한 소년이 이 현자를 골탕먹이려고 하였다.그는 손에 살아있는 새 한마리를 잡고서 “존경하는 선생님,내 손에 있는 새가 살아 있을 것입니까? 아니면 죽어 있을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만약 현자가 죽는다고 말한다면 그 소년은 당장 손을 벌려 날려 보낼 것이고,산다면 그는 손으로 눌러 죽은 새를 보일 것이다.

놀라웁게도 그 현자는 소년의 손을 전혀 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눈을 한참 보더니 조용히 말하기를, “얘야,그것은 네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란다.”라고 했다. 이와같이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란,하나님의 길로 갈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길로 갈 것인가 자기가 선택하는 뜻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갖고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순간에라도 “내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얻지 못한다. 당신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 문제를 물으려고 찾아왔다. 개중에는 의심하면서,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의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하나님의 자기 뜻을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가?

존 옥센함은 동호인지(미국종교보급협회,1913)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일생 동안
길을 찾아 헤매었지
이제 나 알고 있는 것 한가지 있으니
생명 주시고 앞길 인도하실 이 말이네.
그러므로 나는 가겠네. 보장된 길을.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나는 그 길을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망설였다고 한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 그 길을 상당하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어떠한 재능이나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기회를 제공하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젊고 예쁘장한 내 교회 여자 성도 중 하나가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는 산다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 생활은 허무하기 짝이 없거든요”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기를 “교회성가대에서 찬양드리는 것이 선생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당장 그녀는 반문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그걸 아시지요?””선생님은 노래 부르는 재능을 가졌고 또한 성가대가 선생님같은 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능력과 기회,이들 두기지가 동신에 찾아온다면 그것이 다소 막연하든 분명하든 하나님의 명백한 뜻임을 말해준다.
둘째,가끔씩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직접적으로 역사하심으로써 그의 뜻을 나타내신다. 모든 세대 중에 가장 훌륭한 크리스챤의 하나로 손꼽히는 슈바이쳐 박사의 생애를 생각해 보자.그가 자기 생활 안정을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음악,의학,교육 등 다방면에 훌륭한 능력을 가졌었다.오늘날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방면에 대가였다. 그에게는 안정을 누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해야 된단 말인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어느날이었다.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서류 가운데 파리선교협회에서 발간된 조그마한 잡지 하나가 눈에 뜨였다. 이것은 이웃 사람에게 배달되어야 할 것이 그만 실수로 그의 우체통에 넣어졌던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잠깐 훑어 보기 시작했을 때 “콩고 선교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대하였다. 그는 그것을 다 읽고 “나의 연구 활동은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콩고로 가서 우리 모두가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생애를 거기서 살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편 배달부가 그 소책자를 잘못하여 틀린 우체통에 넣었다는 것이 우연한 일이었을까? 슈바이쳐 박사가 지시하심을 받아들일 때까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고 거기 있었다는 것이 단순히 우연히 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 사람 생애를 주장하고 계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어는 찬송가 작사자가 “하나님의 역사는 신비하도다”라고 말한대로이다.

그러한 경험이 나타날 때 그밖에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슈바이쳐 박사는 “나는 너무 많이 배웠기에 그것을 멀리 떨어진 콩고에서 썩힐 수 없노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송두리채 바치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대로였다.

나는 생애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방금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나의 재능과 기회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시를 통해서이다. 그 밖에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 푸른 목장이란 연극에서 어떤 사람은 “주님은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하셨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어떤 남자가 “나는 충고를 얻기 위해 기도했으나 어떠한 응답도 받지 못했어요.그래서 나는 상식대로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 상식을 주는 이는 누구인가?

어느날 한 남자가 나를 만나기 위해 나에게 왔는데 그는 매우 당황해하는 병적인 사내였다. “아무도 나에게 무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아요.”나는 문제에 대한 정황을 알기까지 대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할 때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그에게 답을 하기 전에 수분 동안 생각했던 것을 그 사람에게 이야기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훨씬 길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그가 나에게 이야기 했던 것 중에서 나는 그의 생각을 제안했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제가 생각했던 것이 최고란 말이지요?”라고 말하고서 놀랄만한 해결을 보았다. “저것이 선생님의 문제에 대해선 가장 좋은 해답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일어나서 나에게 뜨겁게 감사하더니 내가 지끔까지 자기가 이야기 해본 상대 중에서 가장 지각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의 생각을 고무시킨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해답을 내릴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포와 두려움이 그의 이성을 압도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가끔 우리는 욕망의 소리로 인하여 우리의 최선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생각하고 추리하기 보다는 우리의 열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 지배당하기 쉽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최근에 남편을 잃은 한 아릿다운 부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유서를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즉시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저는 그이와 40년 동안 함께 살아왔어요.그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그이가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요”라고 말했다. 남편이 유서를 써놓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편의 뜻을 잘 알았다. 그녀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남편과 매년을 매일같이 동고동락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을 읽고 기도로 이야기 하고 교회 예배 시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일을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므로써 우리는 그의 뜻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의 뜻을 행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고 친분을 나누심으로써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당신이 기도한다며?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