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삶을 벗어나는 방법

어차피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다.

삶은 고해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 중의 하나다.
이것이 위대한 진리인 까닭은 진정으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삶이 힘들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힘들다는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대신에 드러내 놓고 또는 은근히 자신이 지닌 어려움 걱정 문제가 엄청나다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그들은 마치 삶은 기본적으로 편안한 것처럼 다시 말해 삶은 응당 편안해야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이 특별히 자신이나 가족 부족,계급,국가,인종 혹은 인간에게만 들이닥친 유례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놓고 또는 은근히 발설한다.
나 자신도 그래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평이 어떤 것인지 안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저 불평하고 싶은 걸까
우리 아이들에게 이 문제들의 해결 법을 가르치고 싶은 걸까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는 훈육이다.
훈육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부분적인 훈육으로는 일부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
온전한 훈육이 있어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어떤 문제냐에 따라 절망 비애 슬픔 외로움 죄책감 후회 분노 두려움 걱정 고뇌 좌절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진다.
종종 아주 불편해지고 육체적인 통증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은 때로 가장 심한 육체적 고통과 맞먹는다.
우리가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건이나 갈등이 야기하는 바로 이 고통 때문이다.
삶은 끊임없이 문제를 연속적으로 배출하고 있으므로 삶은 항상 힘들고 기쁨과 동시에 고통으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삶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이 문제들이다.

벤저민 플랭클린의 말대로 고통을 느껴야 배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은 문제를 환영하며 실제로 문제가 주는 고통을 환영하는 법을 터득하려 한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당면한 문제를 두려워하면서 피하려든다.
문제를 질질 끌면서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문제를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심지어는 문제를 잊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약을 복용하여 결국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마비시킴으로써 고통을 안겨준 문제를 잊기도 한다.
우리는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주면에서 맴돌려고 한다.
문제 안에서 괴로워하기 보다는 문제 밖으로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문제와 이에 따르는 고통의 감정을 피하려는 이러한 성향이 정신병의 근본 원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든 작든 이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크든 작든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문제와 이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상당히 멀리 가버린다.
쉬운 길을 찾기 위해서 분명히 건전하고 지각 있는 모든 방법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안주할 수 있는 환상을 최대한의 공력을 들여 만들어낸다.
때로 이러한 현상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 되기도 한다.
칼 융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표현대로 라면 신경증 즉 노이로제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피하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 피하려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 진다.
신경증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과 문제를 피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신경증은 더욱 더 쌓인다.
그런데 다행히 어떤 이들은 신경증에 대겨할 용기를 지니고 있어서 대체로 정신분석가의 도움을 받아서 정당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나간다.
어떤 경우든지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정당한 고통을 피하려 하면 역시 문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장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만성적인 정신병 상태에서 더 이상 성숙하지 못하고 정체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치유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시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정신적,영적으로 건강해지는 법을 늘 가르치도록 하자.
고통을 겪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문제에 직면하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는 뜻이다.
이미 나는 훈육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라고 말했다.
이것이 괴로움을 견디게 해주는 테크닉이고 문제가 주는 고통을 겪으면서 끝까지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다.
그 과정 중에 우리는 배우고 성장한다.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훈육 시킨다는 것은 괴로워하는 법과 동시에 성장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의미다.
훈육은 괴로움을 감당하게 하며 문제로 인한 고통을 건설적으로 겪게 한다.
그렇다면 훈육이라는 이 도구는 과연 무엇인가.
훈육에는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책임을 지는 것,진리에 대한 헌신,균형잡기,이렇게 4가지가 있다.
이것은 복잡한 도구가 아니라서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주 단순해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열 살이 될 때쯤에는 사용법에 능숙해 진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왕과 같은 힘 있는 사람들이 종종 이 단순한 사용법을 잊어버려 삶을 망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 도구의 복잡함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이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각각의 도구들을 분석해 보고 그것을 사용하려는 의지 즉 사랑이라는 것을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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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통해 삶의 고통,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나는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대처를 했는가? 라고 반문해 보고 나의 대처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스캇펙의 글처럼 나 또한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회피했던 순간들이 대부분 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고통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삶은 평탄해야 하고 힘들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정반대로 고통이 동반된 삶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면서 살아내는 능력이 진짜 삶인 것 같다.
이 글을 보면서 독자들도 자신의 삶의 문제와 고통을 지혜롭게 해쳐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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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캇 펙] “어떻게 내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일 수 있을까? 라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일을 통해 깨닫는 진정한 삶의 의미

거센 파도는 1등 항해사를 만든다. 새뮤얼 스마일스 지음의 일부를 발췌함

열심히 일할 의무는 모든 계층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든,가난하든 부자든 각기 해야 할 일이 있다.설사 좋은 집에서 태아나고,훌륭한 교육을 받고,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해도 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 마땅히 책임져야할 의무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자신의 현재를 있게 해준 사회에 보답은 전혀 하지 않고 타인의 노동에만 의존하여 먹고 입거나 남의 보살핌만 받는다면 진정한 만족감은 얻을 수 없다. 성실한 사람이라면 함께 먹고 마신 후에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행동에 반감을 느낄 것이다. 게으르고 세상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람에게는 명예도 특권도 있을 수 없다.
그릇이 작은 사람은 낭비하는 것으로 만족하겠지만,목표를 이루고자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올바른 목적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명예나 존엄이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고통은 극복하는 것,일을 완수하는 것

신학자 스탠리 경,즉 더비 백작은 글레스고를 방문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사람이 좋고 존경받는다해도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일은 우리의 인생 그 자체이니 누군가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당신의 실력을 당당히 보여 주십시오.”
자기 일에 갖는 애정이야말로 저속한 취미에 매달리는 것을 막는 최선의 예방책이다. 게다가 일을 사랑하는 것은 별것도 아닌 고민과 자기애로 발생한 분노를 푸는 최선의 수단이라 해도 좋다.
우리는 지금까지 고난과 고뇌로부터 도망치려면 자기만의 세계에 숨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많은 사람이 이 방법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항상 뻔했다. 결코 고통과 노동으로부터 도망쳐서는 안된다. 이 두 가지는 인간의 숙명이다. 고난과 맞서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고난이 저절로 다가오는 것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가능한 한 늘 작고 편한 일을 하려고 꾀를 부린다. 그러나 자연은 노동 본능을 공평하게 분배하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는 사소한 일이라도 게으른 사람에게는 힘들게 느껴지도록 만들어 놓았다. 자기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젠가는,아니 금방이라도 자연의 엄중한 가르침을 배우게 될 것이다.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도 어떤 식으로든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다소라도 유효했던 정신력은 텅 빈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날조된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계속해서 소모될 것이기 때문이다.
즐거운은 적어도 항상 세상에 뭔가 도움되는 일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보수를 받는 기쁨을 맛볼 수 없다.
“일을 가지고 있으면 깊은 잠을 잘 수 있고,아침에 기분 좋게 눈 뜰 수 있다. 여가를 맘껏 즐기려면 학문이든,의무를 수반하지 않는 일이든,일하고 싶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다.”라고 월터 스콧은 말하고 있다.
사실 과로로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키는 대로 나태하게 살다 죽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과로로 숨지는 사람은 건강관리를 잘못 해서이거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이 원인인 경우가 더 많다.

진정한 삶의 의미


실제로 살아온 세월의 길이로 인간의 수명을 헤아릴 수는 없다. 어떤 업적을 남기고 무엇을 생각했는냐에 따라 살아온 길이를 헤아려야 한다. 남에게 봉사하면 할수록,사색하거나 감동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늘 게을리 살며 주변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해도 그저 숨만 쉬고 있는 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옛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설파한 사람들은 스스로 모범을 보이며 노동의욕을 불태웠다.
사도 바울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며, 타인에게 폐 끼치지 말고 스스로 손을 더러혀가며 일할 것을 가르쳤다. 선교사 보니파티우스는 영국에 도착했을 때 한 손에 복음서를,또 한 손에는 목수의 연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영국에서 독일로 건너갈 때에는 건축 기술을 익힌 상태였다. 루터도 원예사와 목수,선반공,게다가 시계기능공등 갖가지 직업을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며 매일의 양식을 자기 손으로 얻었다.
나폴에옹은 훌륭한 장인의 기술을 견학하러 가면 신분 계층과는 상관없이 그 장인에게 깊은 존경을 나타냈으며,돌아오는 길에는 겸손하게 머리 숙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살게 된 나폴레옹이 어느 부인과 길을 걷고 있을 때의 일읻. 짐을 짊어지고 오는 몇 명의 하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부인은 성난 목소리로 길을 비키라고 거칠에 명령했다.하지만 나폴레옹은 “부인,그들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중입니다.”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한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는 하찮은 일이고 더럽고 추한 일이더라도 그들은 사회의 행복에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허탈감과 무력감을 떨쳐내는 비결

어느 중국 황제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한 명이라도 일하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그리고 한 명이라도 게으른 여자가 있다면,반드시 이 나라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고 있을 것이다.”
항상 유익한 일을 하는 습관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행복의 열쇠를 쥐는 기본 조건이다. 일하지 않는 여성은 두통과 히스테리를 동반한 권태감과 무력감에 빠지기 쉽다.
어떤 어머니는 시집가는 딸에게 절대 그런 무기력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며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얘야,나도 휴일에 아이들이 모두 나가버린 후에는 뭘하면 좋을지 몰라 한낮의 부엉이처럼 멍해진 적이 있단다.그래도 너는 젊은 주부들이 쉽게 빠지는 그런 기분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열심히 일해라. 게으른 습관은 악마가 쳐놓은 함정이라고 했던 네 할아버지의 말씀은 참으로 옳은 말씀이란다.”
끊임없이 도움되는 일을 하는 것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도 건강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게으른 사람은 스스로를 희생물로 삼는다.

게으른 사람은 인생의 길을 축 늘어져서 질질 끌려가듯 걷고,설사 아직은 일할 능력과 여력이 남아 있다 해도 깊은 잠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활력이 넘치는 사람은 주위 사람에게 힘과 기쁨을 주는 원천이 된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이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시인 찰스 램은 감옥살이에서 풀어나 회사에 근무했는데,매일 정해진 단조로운 책상 업무에서 해방되었을 때에는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기뻤다.
“하루에 1만 파운드를 받더라도 저 감옥에서 10년을 더 살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환희로 가득 찬 편지를 친구에게 보냈다.
“난 지금 편지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몹시 들떠 있다네.나는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되었어! 단언컨데 인간에게 최고의 순간을 아무 일도 안 하고 쉬고 있을 때야.그 다음은,그래.아마도 좋은 일을 하는 거겠지.”
그 후 지루한 세월이 2년이나 흘렀다. 램의 생각은 그 사이에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그는 단조롭기는 했지만,’매일 정해진’ 그 사무적인 일이 자기에게 얼마나 행복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예전에는 친구였던 시간이 지금은 적이 되었다. 그는 다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일하지 않는 것은 지나치게 일하는 것보다 더 나쁘더군,정신이 내 자신을 갉아 먹고 있어. 가장 나쁜 음식이지.
세상 일에 전혀 흥미를 못 느끼겠어….. 인생에 절망한 인간에게는 천국에서 은총의 비가 내리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산책뿐, 그것도 이젠 너무 걸어서 지쳐 버렸어. 나는 시간을 말살하는 흉악한 살인자야. 내 앞에는 지금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아.”

지식은 남에게 뺏기는 일이 없다.

스콧은 피로를 모르고 일하는 사라이었다. 부지런함이 실생활에 얼마나 중요한지 스콧만큼 잘 깨달은 사람도 없을 것이다.스콧은 근면이 사회에 보탬이 되고 행복을 가져오는 중요한 수단임을 다음 편지에 잘 나타내고 있다.
“노동이란 신이 모든 지위의 사람에게 부여한 계약임을 자넨 아직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몰라. 농부들이 땀 흘리며 얻은 빵은 말할 것도 없고, 부자들이 권태감을 잊고자 즐기는 사냥에 이르기까지 몸을 움직이지 낳고 얻은 것은 아무 가치도 없어.쟁기로 땅을 경작하지 않으면 보리가 자랄 수 없듯이,일하지 않으면 지식은 사람의 마음속에 깊은 뿌리를 내릴 수 없지. 하지만 실제로 이 두 가지 사례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어. 보리의 경우에는, 그 때의 조건과 환경에 따라 씨앗을 뿌린 사람이 반드시 곡식을 수확한다고는 할 수 없어. 그러나 인간의 경우에는,사고가 나든 불행이 닥쳐오든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남에게 뺏기는 일이 없어. 스스로 획득하고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풍부한 지식은 모두 자신을 위해 사용되지.그러니까 지식을 얻도 습득하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하는 거야. 시간은 값지게 써야 해. 젊을 때는 발거움도 가볍고 순수하기 때문에 지식을 흡수하기가 그만큼 쉬워. 하지만 노력을 게을리 하면 봄과 여름은 의미 없이 지나가 버리고 결국 가을에 수확할 거라곤 쭉정이뿐.그리고 늙어서 맞이하는 겨울은 누구에게도 존경받을 수 없는 황량한 삶이 될 뿐이야.”

현대의 지식이란

현대 사회는 지식은 무엇을 의미할깨? 라고 깊이 생각해 본다
지식보다는 지혜롭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삶는 것이 더 현명한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즘은 AI,챗GPT등 지식의 홍수에서 살아가는 세대다. 휴대폰만 있으면 거의 모든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머리에 넣지 않아도 손안에 지식이 너무 넘쳐 흐르는 시대를 살아간다. 심지어는 언어 또한 동시 번역을 통해 소통이 가능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지식을 얼마나 나에게 맞게 효과적으로 활용하느냐가 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보여진다.
옛날의 노동은 몸을 움직여서 생산된 것으로 부를 축척하곤 했지만 지금은 버튼 몇번으로 부를 축척할 수 있는 시대인 것이다. 노동의 개념이 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나태해 지지 않기 위해 많은 것에 도전하는 것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하고 이것들이 나를 권태기로 부터 탈출시켜준다고 보여 진다. 나 또한 근 10년 전과 비교해 보면 많이 나태해 진것 같아 안타깝다.
시대에 맞춰 부지런함을 떨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