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에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내일에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어느날 한통의 요청의 편지가 왔다.”내일에의 확신을 얻고 냉정하게 미래를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셔요.” 이 편지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과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현재에만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 두려움과 무력함을 느낍니다.”

미래의 확신을 얻는 첫 단계는 인생은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9). 이 원리는 현재나 과거에 동일하게 적용되며 미래에도 적용된다. 이것은 발생하는 모든 일이 다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미래의 생애에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알므로써 우리는 개개의 경험들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로서의 인생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배를 한 실예로 들어보겠다. 배의 목적은 대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데 있으나 배의 모든 부속들이 물 속에 잠겨있지 않다. 이를테면 엔진과 같은 것이 물에 잠기면 즉시 침몰할 것이다. 배의 모든 부품들이 모두 조합되어 있을 때 배는 항해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진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은 나쁜다. 어떤 것들은 좋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경험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 경험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결합될 때 인생은 전체로 보아서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저것은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내일에 모든 슬픔과 절망, 고통이 제거되라는 확신을 구하지 않는다.

희랍신화에 저승으로 가기 위해 삼도천이라는 강을 건너려는 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룻배 사공인 카론은 그녀에게 망각의 강물을 마시면 지나온 전생의 모든 과거 일을 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은 즐거웠던 일도 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실패했던 일만 잊을 것입니다.” “부인은 승리했던 일도 잊을 것입니다.” “나는 미움 받았던 일을 잊을 것입니다.” “부인은 사랑받았던 일도 잊을 것입니다.” 이야기는 결국 그 부인이 좋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쁜 일도 기억하는 것이 낫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것은 미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얼마의 주술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물만 마심으로 미래의 고통이나 실패,미움등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이란 언제나 두가지 면으로 되어 있으며 한 면을 부수면 반드시 다른 면도 부셔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또한 기쁨,승리,그리고 사랑도 제거해야 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은 나쁜다. 또 어떤 것은 좋다. 그러나 인생 자체는 신빙성이 있다.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갖고 나아갈 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미래를 대처해 나간다.

우리는 내일에 대해 왜 걱정하는가?

우리는 내일에 대해 왜 걱정하는가? 무언가 나쁜 것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슬픔과 패배가 있음을 안다. 시편 기자의 말들을 인용해 보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기자는 앞길에 골짜기가 있음을 알았다. “통하여(우리가 성경에는 번역 되지 않아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즉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나간다는 의미가 있다.) 라는 말에 주의하라.이것이 그가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 이유가 된다. 당신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알고 있다면, 심연의 고통 가운데서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아는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만약 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다면 그는 패배감도 결코 최종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내일에의 두려움은 소망으로 탈바꿈하게 되며 소망 가운데 있을 때 인생은 좋다.

모든 문학 중에서 주옥과 같은 가장 순수한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테니슨의 [명상록]을 꼽을 것이다. 거기에서 당신은 “우리를 남자로 만드는 위대한 희망”이란 놀라운 구절을 볼 수 있다. 소망은 생애 능력을 공급해 준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잠13:12)

최근에 어떤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많은 그룹의 사람들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그들 모두는 똑같은 일을 했는데 막바지에 이르자 어떤 사람들은 피로하여 흐느적거리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도리어 강한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곧 드러났다. 한 그룹은 그날밤 파티를, 주말 여행을, 또는 가정에서 무언가 즐거운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다른 한 그룹은 기대할 아무러한 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소망을 가지고 싶어한다면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소망은 그것이 목적을 가릴 때라야 참된 것이다. 나는 꿈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음이 두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1) 당신이 생애 가운데 참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2) 당신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시작하는가? 이들 두 질문은 목적을 창조적인 행위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그것을 가질 때 모든 두려움은 자동으로 제거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의 힘 이상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서 기도드릴 때이다.

우리가 참으로 기도한다면 절망적인,불가능한,패배적인 말들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 제거될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요14:13) 이 약속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어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주석한대로다. “하나님은 전에 말씀하신 어떤 약속도 깨뜨리지 아니 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네가지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1)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범위 안에 이미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다음날 시험에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으나 그만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믿음을 상실한 채 쓴 웃음을 지으며 하나님의 약속이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음해 그는 하나님이 필요 없었고 홀로 지내려고 결심했다. 그는 학습 과정을 반복해서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시험에 합격했다. 몇년이 지나서야 그 소년은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그 소년에게 학습과정을 배우고 습득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주셨으나 첫 해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든지”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보다 현명하시며 그는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것과 우리가 그 당시에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를 식별하실 만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어느 여름날 나는 거의 매일 뱃사람과 조그마한 배를 탔다. 그는 훌륭한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운전하는 게 그렇게도 좋았다. 9월이 닥쳐 왔을 때 나는 아버지께 뱃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항상 소원해 왔으며 학교에 돌아가고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고 말씀드렸다. 만약 그때 나의 아버지께서 “좋아,네가 그렇게도 원하던 것을 하고싶어하니 네 좋아하는 대로 하렴”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어찌될 뻔 했겠는가? 그는 나보다 현명하시기 때문에 나의 일시적인 변덕과 내 마음의 진실한 갈망사이를 식별하실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원하는 것을 거절하셨으나 그것은 타고르가 말한 것과 같았다. “주님은 완전히 거절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3)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며 나의 “무엇이든지”가 나 이외 다른 사람의 기도와 상치될 때,하나님은 사랑과 지혜가 무한하심으로 마땅히 응답하셔야 할 기도에만 응답하신다.
얼마 전에 비행기 예약 관계로 전화를 했었는데 여분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 기도했으며 이튿날 그들은 나에게 자리 하나를 남겨 놓았다고 전화상으로 연락을 주었다. 나중에 나는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을 때였다. 예약석을 얻을 수가 없어서 공항에 곧장 나가 좌석 얻기를 기도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나를 도와달라고 매우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나를 싣지 않고 이룩해 버렸다. 하나님은 나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을 태우시기로 조정하신 것이다. 이런 경우 그것은 과히 유쾌하지 못할 것이다.

(4) 미국 애국가의 몇 구절을 유의하여 보아라.
“우리는 가는 길 의롭다면
그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
‘하니님 우리 주 피나처니’
이것은 우리의 모토일세”
우리는 “무엇이든지”는 의롭지 못할 때가 흔히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기도하신 말씀을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여기에 약속이 주어진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그것이 참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이라면,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목적과 뜻에 일치하는 것이라면,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적어도 이런 확신을 가짐으로써,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한 마음으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치 지음 일부 내용 발췌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단 두마디밖에 되지 않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심각한 물음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어떠한 형태로이건 우리 모두의 심층의식 저변에는 이러한 문제가 내재해 있기 마련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를 찾아서 해결하지 못한다면 당신에게 있어서 인생의 의미는 보잘 것 없는 것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한번도 물어보지 못한 존재도 있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개.돼지와 같은 자들은 인생의 아무 목적이나 의미도 갖지 못한 채 허둥지둥 돌아다니다가 그들의 욕망을 만족시킬만한 것들을 만나면 주워 먹기나 한다. 이것은 동물적인 사고 방식이다. 보다 고차원적인 인생은 삶의 이유를 궁구한다. “내가 왜 사는가?” 당신에게 이보다 더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가 또 있겠는가? 당신 삶에 있어서 진정한 성공이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느냐 못 찾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 “아버지께서 내개 하라고 주신 일을 이루어…”(요17:4),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애에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계획이 무엇인지 아셨으며 자기가 이것을 할 수 있음도 아셨다. 이것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우리 모든 인간은 여기에 우연히 혹은 어쩌다가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 생애 가운데 당신이 할 수 있는 계획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각 개인에게 선택권과 자유의지를 주셨다. 우리 주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눅22:42)
이 기도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진리를 가르쳐 준다. 먼저는 사람이 그 자신의 생애에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의 뜻을 갖고 있다. 둘째는 자기의 뜻을 따르다가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는 생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두 요소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기도는 한낱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이와같은 선택에 직면한다. 모든 물음에 언제나 정답을 들려주는 한 현자의 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한 소년이 이 현자를 골탕먹이려고 하였다.그는 손에 살아있는 새 한마리를 잡고서 “존경하는 선생님,내 손에 있는 새가 살아 있을 것입니까? 아니면 죽어 있을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만약 현자가 죽는다고 말한다면 그 소년은 당장 손을 벌려 날려 보낼 것이고,산다면 그는 손으로 눌러 죽은 새를 보일 것이다.

놀라웁게도 그 현자는 소년의 손을 전혀 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의 눈을 한참 보더니 조용히 말하기를, “얘야,그것은 네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란다.”라고 했다. 이와같이 우리 각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란,하나님의 길로 갈 것인가, 그 밖의 다른 길로 갈 것인가 자기가 선택하는 뜻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갖고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순간에라도 “내가 왜 사는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얻지 못한다. 당신 개인의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 문제를 물으려고 찾아왔다. 개중에는 의심하면서,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의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하나님의 자기 뜻을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가?

존 옥센함은 동호인지(미국종교보급협회,1913)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내 일생 동안
길을 찾아 헤매었지
이제 나 알고 있는 것 한가지 있으니
생명 주시고 앞길 인도하실 이 말이네.
그러므로 나는 가겠네. 보장된 길을.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나는 그 길을 알지 못했으며 그래서 망설였다고 한다.
우선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셨을 때 그 길을 상당하게 보여주셨다. 우리는 어떠한 재능이나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또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뜻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인간에게 기회를 제공하시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다. 젊고 예쁘장한 내 교회 여자 성도 중 하나가 나의 사무실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저는 산다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내 생활은 허무하기 짝이 없거든요”라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하기를 “교회성가대에서 찬양드리는 것이 선생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입니다.”당장 그녀는 반문했다. “목사님은 어떻게 그걸 아시지요?””선생님은 노래 부르는 재능을 가졌고 또한 성가대가 선생님같은 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능력과 기회,이들 두기지가 동신에 찾아온다면 그것이 다소 막연하든 분명하든 하나님의 명백한 뜻임을 말해준다.
둘째,가끔씩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직접적으로 역사하심으로써 그의 뜻을 나타내신다. 모든 세대 중에 가장 훌륭한 크리스챤의 하나로 손꼽히는 슈바이쳐 박사의 생애를 생각해 보자.그가 자기 생활 안정을 구가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음악,의학,교육 등 다방면에 훌륭한 능력을 가졌었다.오늘날로 말할 것 같으면 그 방면에 대가였다. 그에게는 안정을 누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해야 된단 말인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어느날이었다.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서류 가운데 파리선교협회에서 발간된 조그마한 잡지 하나가 눈에 뜨였다. 이것은 이웃 사람에게 배달되어야 할 것이 그만 실수로 그의 우체통에 넣어졌던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잠깐 훑어 보기 시작했을 때 “콩고 선교의 필요성”이라는 제목의 소논문을 대하였다. 그는 그것을 다 읽고 “나의 연구 활동은 끝났다.”라고 말했다. 그는 콩고로 가서 우리 모두가 상상으로밖에 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생애를 거기서 살았다.

나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우편 배달부가 그 소책자를 잘못하여 틀린 우체통에 넣었다는 것이 우연한 일이었을까? 슈바이쳐 박사가 지시하심을 받아들일 때까지 며칠 동안 발견되지 않고 거기 있었다는 것이 단순히 우연히 된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손길이 그 사람 생애를 주장하고 계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은 어는 찬송가 작사자가 “하나님의 역사는 신비하도다”라고 말한대로이다.

그러한 경험이 나타날 때 그밖에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슈바이쳐 박사는 “나는 너무 많이 배웠기에 그것을 멀리 떨어진 콩고에서 썩힐 수 없노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송두리채 바치고 싶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신 대로였다.

나는 생애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방금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나의 재능과 기회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계시를 통해서이다. 그 밖에도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이 있다.
우리는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 푸른 목장이란 연극에서 어떤 사람은 “주님은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도록 하셨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그러자 어떤 남자가 “나는 충고를 얻기 위해 기도했으나 어떠한 응답도 받지 못했어요.그래서 나는 상식대로 했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남자에게 상식을 주는 이는 누구인가?

어느날 한 남자가 나를 만나기 위해 나에게 왔는데 그는 매우 당황해하는 병적인 사내였다. “아무도 나에게 무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 미칠 것만 같아요.”나는 문제에 대한 정황을 알기까지 대답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나는 그가 이야기할 때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마치자 나는 이해하지 못했던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그에게 답을 하기 전에 수분 동안 생각했던 것을 그 사람에게 이야기 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야기가 훨씬 길었기 때문에 그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그가 나에게 이야기 했던 것 중에서 나는 그의 생각을 제안했다. 그는 잠시 망설였으나 “제가 생각했던 것이 최고란 말이지요?”라고 말하고서 놀랄만한 해결을 보았다. “저것이 선생님의 문제에 대해선 가장 좋은 해답인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일어나서 나에게 뜨겁게 감사하더니 내가 지끔까지 자기가 이야기 해본 상대 중에서 가장 지각이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의 생각을 고무시킨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해답을 내릴 만큼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포와 두려움이 그의 이성을 압도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가끔 우리는 욕망의 소리로 인하여 우리의 최선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생각하고 추리하기 보다는 우리의 열정이나 이기적인 욕망에 지배당하기 쉽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최근에 남편을 잃은 한 아릿다운 부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남편이 유서를 남겨 놓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즉시 망설이지 않고 결정을 했다. 그녀는 나에게 “저는 그이와 40년 동안 함께 살아왔어요.그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에 그이가 어떻게 할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지요”라고 말했다. 남편이 유서를 써놓지 않았지만 그녀는 남편의 뜻을 잘 알았다. 그녀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을까? 남편과 매년을 매일같이 동고동락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서 성령으로 감동된 성경을 읽고 기도로 이야기 하고 교회 예배 시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의 왕국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일을 한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므로써 우리는 그의 뜻을 알게 된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의 뜻을 행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교제하시고 친분을 나누심으로써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당신이 기도한다며?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

기도의 방법

기도의 방법

“주여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11:1)라고 제자들이 에수님께 물어 보았다는 사실이 약간은 이상스럽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엄격한 종교적인 가문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교회에 줄곧 다녔고 기도를 해왔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제자들의 이 질문이 있기 1년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라고 물어 보았다면,그들은 매우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대꾸했을지도 모른다. “아니,그걸 말씀이시라고 하세요.우리는 수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시간을 내어 규칙적으로 기도해왔는데 그것 하나 모른단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아마 당신에게 성경 속에 있는 요절들을 인용해 가며 입이 닳도록 답변했을 것이다.그들은 아마도 기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또 기도해야 할 이유를 타당성있게 설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막상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기네들이 참으로 기도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얼마나 많이 기도하셨는지,그리고 이 기도가 주님의 생애가운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수차에 걸쳐 기도하러 나가시고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기도가 제자들에게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으나 주님께서는 능력이 있었다.

이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주님의 기도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기도해 왔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들은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들이 참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우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그들이 간청했던 것은 이날 이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제자들의 간청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즉 기도할 때의 첫 단계는 이러하다. 먼저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켜야 하고,당신이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인지해야 하고,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성령의 충만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 문호 톨스토이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부유했고 존경받았으며 사방에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이때까지 인생의 죄의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왔으나 이제는 그 모든 두려움이 그를 괴롭혀 잠시도 안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느날 그는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한 농부를 보고서 그의 얼굴에 비친 평화와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윽고 톨스토이는 중얼거린다.”이 농부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다지도 기뻐하누나” 그는 잠시 동안 그 농부를 응시한 후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자이기에 기쁨을 지닐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도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때부터 마음 속에 쌓였던 불만족과 고민을 해결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체득한 결과로서 다음과 같이 위대한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인생을 아는 것이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수용적인 마음으로 기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신은 아침에 그날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어난다. 당신의 생각은 활동적이고 공격적이며 매 시간마다 직장에서,과외활동에서 생각과 시간과 정력을 소비한다. 그날 밥 당신은 음악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러나 당신이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기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음악 연주회라면 공격적이고 활동적인 것보다 수용적이 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를 시작한다면 수용적이 되어야 한다. “잠잠하라 그리하면 내가 하나님임을 알리라.”고 시편 기자는 말하였다.

기도의 첫 단계는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격적인 마음을 수용적인 마음으로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고 저것은 내가 하려고 작정한 것이다.”라고 기도하는,이를테면 기도를 하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기도는 여분의 타이어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타이어가 못쓰게 망가졌을 때 사용코자하는 기타의 어떤 것에 불과하다.당신은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면서 당신이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고 결정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때 “하나님 제게 저것을 주십시오” 혹은 “하나님,제가 저것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기도를 기업정신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신다. 예를 들면, 어느 좋은 날 아침 일어난 당신은 매우 기분이 상쾌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다. 당신은 횟바람을 불면서 그날 일어날 좋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감사는 누구에게 한 것일까? 하늘에 대해서인 가? 그것들은 당신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가족과 친지들에 대해서 감사했겠는가? 그들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당신의 삶의 깊은 면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 자신에 대해서인가?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신은 찬사를 표현하는 것이지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비극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 왔다고 하자. 대부분 우리의 첫번째 반응은 원망이다. 우리는 “이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나는 이것을 원망합니다. 내가 이런 곤욕을 당해야 함은 부당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벽을 향해서 말을 했다고 한다면 벽은 사람이 아니기에 말을 들을 수가 없다. 어떤 친구에게 생각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에게 실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사람이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어떤 능력이 우리 일상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부끄럼움을 느낀다. 우리가 발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밖에 어떤 분으로 인하여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자신을 인지하게 하신다.

능력의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열고 그의 존재에 대해,성령에 대해,음성에 대해,뜻에 대해 수용적이게 한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시느리라”고 말씀하셨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많은 말을 하는데 있지 않다. 먼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도하는 마음은 힛티어가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것과 같다고 본다.

우리의 온갖 수고를 다할 때까지
주님의 고요한 음성을 들으라.
우리의 정한 생명 다할 때까지
주님의 평안한 모습을 보아라.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켜 기도한다면 두가지 결과가 따라 나올 것이다.

첫째로,그렇게 하는 기도는 부정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어떤 사람이 수차에 걸쳐서 나에게 “나는 기도했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어떤 버릇을 고치기 위해,어떤 곤궁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할 때 아무 것도 못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아파서 낫기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자.그 사람은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저는 지금 몹시 아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아픈 것 같지 않은데”라고 말씀하신다면 “아니어요,주님은 제 사정을 잘 모르셔요. 제 이마를 한번 만져 보셔요. 그러면 저의 체온이 어떠한지 아실 거여요. 저의 맥박을 짚어 보셔요. 그러면 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아실 거여요. 저는 앉아 있고 싶지 않아요. 먹은 것은 모두 토해내고 싶어요. 저를 낫게 해 주시고 건강을 되찾게 해 주셔요”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없게 한다. 당신 생활의 좋지 못한 버릇을 이렇게 적용시켜 보라. 당신이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 할수록 그것은 당신 생각 속에 굳어질 것이다.만약 어떤 사람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다면 그는 마음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히 받을 것이다.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히 받을 것이다.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삶의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둘째로,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모든 것이기에 우리는 낙심치 않고 기도한다. 우리가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소망을 잃었기 때문이며 소망을 잃은 이유는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하나님은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실 능력을 갖고 계신다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좋은 기도의 모본인 시편 23편을 한번 살펴 보자.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를 믿는 아홉가지 간구하는 말들이 있다. 다윗은 그의 생애에 문제와 약점이 많았다. 그는 때때로 어둡게 보이는 세상에,살고 있었으나 긍정적인 기도를 드렸다. 그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그리고 그의 존전에 있음을 인지했다. 다윗은 기도를 마치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린다. 첫째는,내일은 좋다는 것이다.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그는 기도한다. 둘째로,내일이 지난 다음에도 역시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집”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읽어 보아라.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며 낙관적인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한다.그것은 하늘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함을 보여 주며 우리의 일용할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게 해 준다. 우리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시험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무어 주교는 고층빌딩 창문에서 뛰어내려 투신 자살한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 빌딩 문지기인 늙은 흑인 자살자에 대해서 그 주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자살하는 게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흑인이 하나님을 찾았다면 해야 할 그 밖의 일이 있었을 것이다. 어제가 아무리 불행했고 오늘이 어쩌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한 내일은 좋을 것이다.기도에서 첫번째의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생을 아는 것이다. “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