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내 신문 컬럼에서 이렇게 질문을 했지만 그에 대한 회답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회답들을 다 읽는데 약 일주일이나 걸렸다. 내게 온 많은 편지들을 읽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어떤 회답은 저명한 사업가들의 명함이 인쇄된 용지로, 어떤 것들은 뜯어쓰는 값싼 편지지에 연필로 쓰여져서 왔다. 어떤 편지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들에게서 왔고, 또 어떤 것들은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왔다. 어떤 편지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거룩한 삶을 살아온 것이 엿보이고, 어떤 것들은 그들이 얼마나 죄를 지었으며 얼마나 자신의 생을 부끄러워 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기도하게 될 때 우리 모두는 같은 위치에 서게 되며,각각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 부자나 가난한 자, 성자와 죄인, 이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로써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는 응답하신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구하는 자는 받을 것이요”(마7:8)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또한 내게 매우 진지하게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과소평가 하면서 소위 응답이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며 기도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면 분명히 변화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기도하고 응답 받은 사람들과 논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경우에,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가 뭘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심으로써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

“나는 일본 진제이가쿠인의 나가사키 학교를 위해 무언가 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원자폭탄으로 죽었지만 그들을 위하여 줄 돈이 내게는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지 보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며칠 후 [기독감리회지]에서 이 학교를 위해 [National Geographic Magazine]의 발행본들을 요청하는 난을 보았습니다. 나의 부친께서는 수년간 이 잡지를 구독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낡은 발행본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주 기꺼이 그것들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교장인 타네오지바님은 그 잡지들에 대해 매우 감사해 하셨습니다.”

82세의 한 귀부인은 어떤 수술이 끝난 후, 자기가 다시는 걷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이렇게 썼다.
“다음날 아침, 나는 간호원에게, ‘나는 일어서겠다. 만일 내가 쓰러질지라도 주께서 나를 잡아주실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간호원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비키라고 하고 걸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나는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것을 들으니 나는 주께서 어떤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요5:8) 그 부인의 신앙과 정신을 가진다면 수많은 사람들도 갖가지 방법으로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기도야말로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고 생각했다.

기도 응답의 예에 대한 내 요청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종종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여러 회신들이 왔다. 한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당신은 성서의 엘리와 사무엘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아이에게 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면 내게도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우린 마이애미에서 살려고 그리고 갔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를 사는데 자기와 같이 투자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나는 그것을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남동생은 그것을 수지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후 어떻게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거기앉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왜 망설이는지 알고자 했고 이유를 알자 좋은 제안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지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 일에 돈을 투자한 사람들은 몽땅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그 얘기가 거의 우습게 들릴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전에는 결코 일을 추진하지 않는, 몇몇의 성공한 사업가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기도 응답에 대해 내가 받은 편지들 중엔 병과 치유에 관계된 것이 많다. 이것은 내가 확실히 믿는 어떤 것이다. 나는 하루도 빼지 않고 어떤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내가 받아온 응답들을 나열하면 책 한 권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들에 대해 써 보낸 많은 편지들을 보고서 나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


어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몇 주 전 심한 심장마비를 앓고 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막 돌아왔습니다. 문병객들을 받아도 좋을 만큼 내 상태가 좋아졌을 때, 아홉살 난 내 어린 손녀가 제 부모랑 같이 날 보러 왔답니다. 그들이 돌아가려 할 때 손녀가 되돌아 내 침대 곁으로 오더니 하는 말이,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으신 줄 아셔요?’ ‘모르겠는 걸, 왜지? 그러자 그애는 ‘그건 할아버지 나으시라고 내가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이어요’라고 말하더군요”
당신은 아홉살 난 어린 여자 아이의 기도가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고 믿는가?


또다른 편지는 곧 치룰 수술을 무척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썼다.
“나는 하나님께서 수술칼을 인도하시고 또 그 칼을 쥔 사람의 마음을 인도하시며,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내 곁에 가까이 계셔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책임져 주시길 구했고, 결과가 무엇이든 거기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서 말했습니다. ‘주여,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사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저는 살 것이며, 죽는 게 당신 뜻이라면 저는 죽겠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순간, 내 마음의 무거움과 무서운 공포, 그 모든 짐이 내게서 옮기워졌습니다. 그리고 즉시 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가 거기 계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 사람 마음 속에 찾아온 평화와 안정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주 가능한 일이다. 그 경우 하나님은 의사를 통해 역사하셨지만 그 의사는 환자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들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나는 특히 이 예를 좋아한다.

“내 아들은 자동차 사고에서 즉사해서 그의 젊은 아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찌나 가슴아파하는지 곧 완전히 쓰러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우린 모두 그녀를 위로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제발 내 아들 대신 그녀 마음 속에 들어서 줄 다른 남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삶 속에 한 젊은 남자를 보내셨고 그녀의 비통함은 곧 행복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혼해서 이제 어린 사내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아주 행복했고 그래서 그녀의 부모와 나도 행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이 두 젊은이들이 만나게 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라고 했는데, 이런 경우는 정말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


다른 한 편지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내가 가장 열심히 기도하여 4년이나 걸려 응답을 받은 일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내겐 훌륭한 사내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애가 한 살 때 우린 아이를 하나 더 낳아 둘이 같이 자라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기의 첫 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린 곧 둘째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그 아이를 잃었을 때 우리의 비통함과 실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실망을 생각해 보십시오.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실망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3년 동안 우리는 두 아기를 더 잃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는 동안 나는 계속 하나님께 아이를 하나 더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매일 밤, 나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내가 좀 이기적인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점점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만한 축복도 받지 못한 사람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자 순식간에 절망감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계획에 따라 내 인생을 인도하시길 간구했습니다. 내 기도에 응답을 가져온 것은 아마도 내가 가장 바라던 그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였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의 다섯번째 생일이 두 주 지난 후에 예쁜 사내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축복에 대해 매일밤 감사를 드린답니다.”
가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다리라.”
아마도 그 분은 우리가 그의 응답을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기에 대해 잘 모르는 것 만큼이나 기도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공기로부터 그 경이로운 힘인 전기를 끌어내는 발전기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우리는 그 힘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무수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기를 만드셨다. 나는 우리집을 밝히는 전기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 삶을 밝히는 힘을 만드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리라고 믿는다. 우리의 버스를 움직이는 힘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이 살아가게 하는 힘 만드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리라고 믿는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기 위한 수단이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소서!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내용 발췌

병고침을 받기 위한 기도

성경은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강조한다.믿음의 기도로 말미암아 병고침과 건강을 얻으려면 네가지 기본적인 지침을 따라야 한다.

(1) 하나님은 병을 고칠 수 있고 또 고치시리라는 원천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2) 하나님은 의학과 신앙을 동일하게 사용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3) 치료를 하는 데 있어 죄된 행동이나 영적으로 방해가 되는 것들을 끊어 버려야 한다.
(4)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알고 받아 들여야 한다.

(1)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문제는 어떠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있느냐 혹은 하나님이 없느냐이다.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과 육체 가운데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능력은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문제는 믿느냐 아니면 믿지 않느냐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가 병든 아들을 데리로 예수께 나온 사실을 알고 있다.그가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자 주님은 “네가 믿으면”이라고 말씀하셨다.(막9:22~23) . 가정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도 인간의 상호관계성을 맺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믿느냐 혹은 안믿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들은 완전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완전하게 불신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신앙과 불신앙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 문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 중에서 어는 것을 잡느냐에 있다. 당신이 만약 신앙을 강조함으로 믿음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성장한다. 그것은 당신이 통과해야 하는 첫 관문이다.

(2) 의사를 부르러 부르고, 병원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자연적인 법칙, 영적인 법칙 모두를 사용하여 일을 하신다. 의사는 인체 구조를 알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안다. 그는 또한 육체의 질병의 성질과 원인과 치유방법을 알고 있다.
물론 의사의 지식은 완전히 못하다. 그래서 그는 많이 배워야 한다. 여기에 의학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은 의사들을 만드셨고 의약품을 만드셨다. 다만 인간이 이들을 잘 배합함으로써 우리 치료에 대한 기도가 많이 응답받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느냐는 그가 응답하시는 사실보다 중요치 않다.

그러나 치료에는 의학을 훨씬 뛰어 넘는 요인들이 있다. 나는 하나님께 병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가장 먼저 의사와 간호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하나님의 치료하는 은혜를 받아서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법칙이나 그들의 처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령한 법칙이 있다. 믿음을 사용함은 의학을 사용함과 같이 과학적이며 실제적이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경우에 병든 자를 건강하게 하고 죽음과 불치의 병에 대해서 결정적인 능력을 나타낸다.

(3) 병 고침과 건강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사용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고 약품의 사용과 믿음의 사용 사이의 관계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을 가로막는 것들을 피해야 한다.
나는 헤롤드 설만에게 몇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나의 책 [하나님의 심령과학] 에 대해 칭찬하는 말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성공에 이르는 열쇠] 라는 그의 책이 더 훌륭하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대해서 많이 다루었다. 훌륭한 예를 들었는데 그것은 주로 그의 체험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고정 직업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중요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교정보는 부서에 종사하였다. 수 개월을 열심히 일했으나 보람도 없이 해고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아무 도움도 얻지 못하고 돈만 소비했다. 이 사실은 그에게 금전적인 어려움과 창피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목구멍에는 감염이 생겼다. 그는 가장 좋은 의약의 치료를 받아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그는 미움을 버리고 그에게 잘못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용서해 주었다. 그도 또한 용서받았다. 그랬더니 그의 목구멍은 깨끗이 치료함을 받았다.

우리의 언어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라. 예를 들면 ‘명상과 치유’의 유사점을 조사해 보자.
당신이 이들을 좀 더 세밀히 조사해 본다면 하나님을 명상하면 인간 육체에 치료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완전함과 거룩함’을 생각해 보자. 사람이 완전히 건강하다면 완전히 죄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 둘은 상호관계성이 있다. 누군가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을 만드신 이가 이들을 완전케 하시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육체를 강건케 하셨다.”

(4) 모든 기도하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응답을 받아야 한다. 어찌하여 어떤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하는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기도가 믿음이 부족하여서이거나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효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는 연구되어야 할 분야이다. 어떤 사람의 기도는 다른 사람의 기도보다 훨씬 역사하는 힘이 많다. 기도로 병이 치료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제각기 자기의 주어진 생명이 끝날 때가 온다. 그렇지 않다면 복된 불멸의 세계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질병이 아니라 건강이며, 병약함이 아니라 강건함이며,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사실을 믿을만한 여러가지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자녀들이 고통받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 기도드릴 때,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건강을 증진시킬 때, 우리의 잘못된 습성을 끊어 버리고 그의 깨끗하게 하심과 용서하심을 받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응답을 얻기 위하여 그의 지혜를 신뢰할 때, 놀라운 평화가 우리 안에 넘쳐날 것이다. 그 평화는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공포를 제거시킨다. 시편 기자의 약속이 우리 안에 성취될 것이다 ”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27:14)
내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마당에서 잎사귀를 끌어 모으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나를 매우 슬프게 했다. 나는 이 가을이 지나면 잎사귀를 볼 수 없다.

나의 서재에는 삼면으로 창문들이 있으며 이 창문들 사이로 아틀란타의 페어뷰 거리를 한눈으로 정겹게 훑어 볼 수있다. 정녕 이 나무들은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하리라. 이 울긋불긋한 가을 빛깔들은 내 영혼에 양식이 되어 왔다. 찰스 킹슬리는 이 장관을 “하나님의 솜씨”라고 불렀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서 바른 마음씨를 가졌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그 잎들도 아름다움을 잃었다. 잎들은 나무에게 “우리는 이 나무에 아무 소용이 없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나씩 하나씩 잎들은 땅에 떨어져 쓰레기가 된다. 저 남자는 잎들을 갈퀴로 끌어 모아서 태워 버리거나 아니면 쓰레기 치우는 자에게 줌으로 쓰레기장으로 옮기운다. 나무들에 잎은 하나도 없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있어 해골같아 보기 흉하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 나가노라니까 언젠가 하나님에 관해서 읽은 말들이 생각난다. 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천상의 쓰레기 모으는 자로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왠지 으시시하다.
그러나 작가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인생이란 하나님 없이는 순수하거나 깨끗케 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 아름다왔던 것들은 모두모두 죽어가고 그리하여 하나하나 우리곁을 떠난다. 우리의 좌절된 꿈이나 바래진 이상,때묻은 양심을 회복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미 쓰레기가 되었고 악취를 풍긴다.

헨리 슬로원 코핀 박사는 중국 내지 선교 사역 중에 원주민 목사 모임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다른 이교 신앙에서 여러분을 돌이키게 한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기적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에도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의 선생님은 놀라운 사실들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목사님이 “그것은 제작들의 발을 씩기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밖에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맞다고 했다. 수건과 대야를 들고서 허리를 구부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더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그가 우리 죄들 – 우리가 은밀히 짓는 죄들 – 을 쳐다 보시고서 씻어 버리고 한번만 그렇게 함으로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점이다.

나무들을 바라보며 있으면서 내 마음은 몇달 앞서 가고 있다. 지금은 저들이 앙상한 가지이나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올 것이다. 그때 모든 나무가지들은 새 생명으로 움틀 것이며 싹이 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더 많은 잎사귀를 가질 것이다. 나무는 아름다움을 또 다시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아도 부끄러움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가지들을 자랑스럽게 하늘을 향해 쭉쭉 뻗고 꿋꿋이 높다랗게 서 있을 것이다.

그는 ‘천상의 쓰레기 치우는 자’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분이시다. (요10:10)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에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다. 분명코 우리는 나무들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 그보다 조금도 못잖게 그의 자녀를 위해 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리라.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내용 발췌

눈물이 흘러 내릴 때

눈물이 흘러 내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사역 중에 가장 위대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보다 많은 시간을 책을 읽는 데에 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데 보냈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는 실제 생활 가운데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를, 진주를 찾는 상인을, 들판에서 경작하는 소작인 농부를, 길가에 자라나고 있는 백합화를, 땅에 떨어지는 참새를 보고서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셨다.

나는 몇가지 할 일이 있어서 마이애미에 간 적이 있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휴가를 얻어 즐기기 위하여 거기에 와 있었다. 어는 휘영청 달밝은 밤 거리를 걸어 내려가다가 어떤 큼지막한 건물 앞을 막 지나려 하는데 한 여자 사원이 혼자서 전보쪽지를 손에 쥐고서 구슬피 울고 있었다. 달빛은 땅위를 더 없이 밝게 비추고 미풍은 간간이 불어오는데 그녀의 슬퍼하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시 걸어나갔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육신의 병이 있다면 의사한테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지 않을까? 만약 그녀가 나를 보고서 내가 누군지를 알았다면 “선생님은 목사님이시지요?나는 지금 슬픔에 복받쳐 울고 있어요. 내 눈에 눈물 좀 씻어주셔요”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내가 신문,라디오,T.V.방송을 통해서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수많은 편지가 날아오며 전화통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때마다 전파자는 무릎을 끓고 자기의 지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다.

마이애미에 있던 그 여인이 나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고통이란 죄의 결과이지요.선생님은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벌을 주고 계십니다. 무릎을 끓으시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리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하나님의 용서가 임함으로 고통이 물러가고 마음의 노래가 되살아 나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은 정답이 못된다.

나는 또한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선생님의 고통은 오직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린다면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해변을 거닐며 달을 바라보셔요. 잔잔히 흐르는 파도 소리를 들어 보셔요.” 때로는 그게 정답이다. 우리는 어떤 조그마한 문제를 갖고 너무 깊이 상심한 나머지 사실보다 더 악화되는 경우를 종종 바라 본다. 그러나 이러한 처방도 언제나 정답은 될 수 없다. 고통은 보다 리얼하다. 누군가가 몇 줄의 시를 남겨 놓았다.
“고통이 사실이 아니라 하지만 바늘을 세우고 그 위에 앉아보렴. 그것이 네 살을 찔러서 피를 낼 때 아파서 싫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통이란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이지요.당신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어린 소녀가 길가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다. 꼬마는 엄마에게 ” 이 세상이 온통 방석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방석이 아니기에 이따금씩 넘어져서 다친다.

나는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리라.”고난이란 선생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찬 바람 북풍이 자작나무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게 하는 것처럼 선생님께 당하는 고난은 영혼에 활력을 주며 인생을 보다 성숙케 합니다.”
그녀가 나에게 상담했다면 나는 아프리카 원시족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믿기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선과 행복을 주려고 하지만 하나님에게 좀 모자란 친구가 있어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마귀가 있어 많은 고통을 인간에게 준다고 믿지만 그것 역시 정답은 못된다.
그러면 정답은 무엇인가?
그 여인이 나에게, 처음부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먼저 밖에 나가 실컷울어버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슬퍼해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울 수 있는 동물로 만드셨으며, 눈물은 정상적인 인간의 일부분이다. 인간 내부에서 슬픔을 억제하는 일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는 그 여인에게 울음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아니므로 그만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 여인이 흘리는 눈물의 원인을 알고 싶다. 아마도 그녀는 외로왔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으나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 못이겨 슬퍼한다. 아마도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휴가 때를 위하여 1년 내내 저축한 돈을 갖고 왔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는 매우 사랑했던 누군가가 죽었음을 알리는 전보를 이제 막 받고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결혼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는 장래 아무 소망도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건간에 나는 그녀에게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녀를 도와주고 싶을 따름이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은 없다. 모든 문제에 해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여 줄 수 있다. 유명한 전령이었던 어니 파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해변에서 생겨났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주었다. 전투에서 죽어 넘어진 소년들의 소지품들이 모래에 흩날리고 혹은 파묻혀 있었다. 사진이랑,편지랑 책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한 소년 옆에 키타가 놓여 있었고 또 한 소년 옆에 반쯤 모래에 파묻힌 성경이 한권 보였다. 어니 파일은 그것을 주워들고 길을 재촉한다. 반 마일 쯤 왔을 때 그는 다시 돌아와 그가 성경을 처음 발견했던 그 장소에 와 소년 옆에 그것을 놓았다.

나중에 그가 말하였다. “내가 왜 이 책을 집어들었는지 또 내가 왜 되돌아 갔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그는 성경을 그 소년의 보모에게 보내어서 그들이 위로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되돌아갔던 것은 그 소년이 성경을 갖고 있다가 죽었기에 성경책은 영원히 소년과 함께 있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이러한 체험은 이 사람이 성경을 인간생명의 해답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이 여인에게 나는 성경을 읽어 주었으리라.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계21:4) 그렇지 않으면 이 성경을 읽어 주었으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그러나 나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이 여인에게 시편 28:7을 읽어 주었을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무한하신 인격적 존재자가 계시고,그리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고,능력으로 세계를 붙드시고, 그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아시는 분이심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난다 해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시다.

어느날 나는 켄퍼노키 늪지대 위를 비행하였다. 저지대로 내려오니까 물 위에 푸르스름한 보기 추한 더껑이가 보였다. 거기에는 더럽고 불결해서 인체를 해치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한 때 그 늪지대의 물은 높은 산에서 흘러 나오는 깨끗하고 맑은 물이었다. 그러나 저지대에서 흐르는 것을 멈추기 때문에 부패하고 만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당신이 저지대에 살면서 멈추면 생애도 부패하기 시작한다. 때때로 당신의 눈물이 눈을 흐르게 함으로 앞길을 바라볼 수 없게 할 때에도 전진은 계속해야 한다. 의사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여러가지 목적을 위해서 두뇌의 여러 부분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람이 걱정하거나 상심할 때면 윗 부분의 두뇌 세포를 사용한다. 두려움도 마찬가지, 윗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아랫부분 두뇌 세포는 육체의 근육활동을 작동시킨다. 활동을 하고 있을 때면 일상생활에서 쌓인 긴장이 윗 부분 두뇌 세포에서 풀어지며 이들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다하게 한다.

뉴 잉글랜드에서 한 사람이 마음에 큰 슬픔과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로 와서 “밖에 나가 꿀벌에게 고통을 말해 보셔요”라고 말했다. 저것은 참으로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벌처럼 부지런하라”고 한다.
사람이 쉬지 않고 일하는 꿀벌을 바라보노라면 아래쪽 두뇌 세포가 작동하는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상심케 하는 긴장도 풀어진다. 당신이 상심하여 눈물을 흘릴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침대로 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맘속에 하나님이 계셔 그의 믿음을 활용하면 그 능력이 당신에게 흘러 넘쳐 현실 가운데 역사한다. 이렇게 계속해 나가노라면 마음 속에 고통도 이길 수 있게 된다.
시편 기자는 ” 내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니… 내가 노래하여 그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했다. 최근에 유행되는 대중가요 “빗속을 거닐면서”라는 노래가 있다. 수년 전에 유행되었던 대중가요 중에 “빗속에서 노래하며”라는 게 있다. 이들 두 노래는 장단이 맞는다. 당신 앞길에 비가 내리고 모든 것이 어둡고 침울해도 걷기를 계속하며 멈추지 말라. 걸을 때 노래가 나온다.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을 가짐으로써 빗속에서도 노래부를 수 있으리라.
“내 마음이 심히도 기뻐하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상심이 비통과 분개와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면 그러한 때 인간은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늪과 같이 되어 버린다. 그러한 때 얼굴을 찌푸리고 싶고, 불평하고 싶은 곳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마음 속에 생겨나는 노래가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

내일에의 확신을 얻기 위하여

내일에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어느날 한통의 요청의 편지가 왔다.”내일에의 확신을 얻고 냉정하게 미래를 대처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좀 가르쳐 주셔요.” 이 편지에는 계속해서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과거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나는 현재에만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생각하면 두려움과 무력함을 느낍니다.”

미래의 확신을 얻는 첫 단계는 인생은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9). 이 원리는 현재나 과거에 동일하게 적용되며 미래에도 적용된다. 이것은 발생하는 모든 일이 다 선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생은 기쁨과 슬픔,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미래의 생애에 좋은 일과 궂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것을 알므로써 우리는 개개의 경험들에 집착하지 말고 전체로서의 인생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배를 한 실예로 들어보겠다. 배의 목적은 대양을 가로질러 항해하는데 있으나 배의 모든 부속들이 물 속에 잠겨있지 않다. 이를테면 엔진과 같은 것이 물에 잠기면 즉시 침몰할 것이다. 배의 모든 부품들이 모두 조합되어 있을 때 배는 항해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진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은 나쁜다. 어떤 것들은 좋다. 우리가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경험들을 생각해 본다면 그 경험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결합될 때 인생은 전체로 보아서 우리에게 좋은 것이다. 저것은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믿음이다. 우리는 내일에 모든 슬픔과 절망, 고통이 제거되라는 확신을 구하지 않는다.

희랍신화에 저승으로 가기 위해 삼도천이라는 강을 건너려는 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나룻배 사공인 카론은 그녀에게 망각의 강물을 마시면 지나온 전생의 모든 과거 일을 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부인은 즐거웠던 일도 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나는 실패했던 일만 잊을 것입니다.” “부인은 승리했던 일도 잊을 것입니다.” “나는 미움 받았던 일을 잊을 것입니다.” “부인은 사랑받았던 일도 잊을 것입니다.” 이야기는 결국 그 부인이 좋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서 나쁜 일도 기억하는 것이 낫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것은 미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얼마의 주술적인 효력을 나타내는 물만 마심으로 미래의 고통이나 실패,미움등을 제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하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이란 언제나 두가지 면으로 되어 있으며 한 면을 부수면 반드시 다른 면도 부셔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또한 기쁨,승리,그리고 사랑도 제거해야 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은 나쁜다. 또 어떤 것은 좋다. 그러나 인생 자체는 신빙성이 있다.이것은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리라.” 우리가 그러한 믿음을 갖고 나아갈 때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미래를 대처해 나간다.

우리는 내일에 대해 왜 걱정하는가?

우리는 내일에 대해 왜 걱정하는가? 무언가 나쁜 것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슬픔과 패배가 있음을 안다. 시편 기자의 말들을 인용해 보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기자는 앞길에 골짜기가 있음을 알았다. “통하여(우리가 성경에는 번역 되지 않아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즉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하여 나간다는 의미가 있다.) 라는 말에 주의하라.이것이 그가 “해를 두려워 하지 않는 ” 이유가 된다. 당신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는 사실을 참으로 알고 있다면, 심연의 고통 가운데서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아는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만약 한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다면 그는 패배감도 결코 최종적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내일에의 두려움은 소망으로 탈바꿈하게 되며 소망 가운데 있을 때 인생은 좋다.

모든 문학 중에서 주옥과 같은 가장 순수한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테니슨의 [명상록]을 꼽을 것이다. 거기에서 당신은 “우리를 남자로 만드는 위대한 희망”이란 놀라운 구절을 볼 수 있다. 소망은 생애 능력을 공급해 준다. “소망이 더디 이루게 되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나니 소원이 이루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잠13:12)

최근에 어떤 사람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많은 그룹의 사람들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그들 모두는 똑같은 일을 했는데 막바지에 이르자 어떤 사람들은 피로하여 흐느적거리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도리어 강한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 이유는 곧 드러났다. 한 그룹은 그날밤 파티를, 주말 여행을, 또는 가정에서 무언가 즐거운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다른 한 그룹은 기대할 아무러한 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당신이 진정으로 소망을 가지고 싶어한다면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 소망은 그것이 목적을 가릴 때라야 참된 것이다. 나는 꿈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음이 두 가지 질문을 제시한다. (1) 당신이 생애 가운데 참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 (2) 당신은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시작하는가? 이들 두 질문은 목적을 창조적인 행위로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그것을 가질 때 모든 두려움은 자동으로 제거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의 힘 이상의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서 기도드릴 때이다.

우리가 참으로 기도한다면 절망적인,불가능한,패배적인 말들은 우리의 생각 속에서 제거될 것이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요14:13) 이 약속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어서 어떤 사람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주석한대로다. “하나님은 전에 말씀하신 어떤 약속도 깨뜨리지 아니 하신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니” 이것을 설명함에 있어서 우리는 네가지 사실들을 기억해야 한다.


(1)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범위 안에 이미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다음날 시험에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소년이 있었다. 그는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으나 그만 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믿음을 상실한 채 쓴 웃음을 지으며 하나님의 약속이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음해 그는 하나님이 필요 없었고 홀로 지내려고 결심했다. 그는 학습 과정을 반복해서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시험에 합격했다. 몇년이 지나서야 그 소년은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그 소년에게 학습과정을 배우고 습득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주셨으나 첫 해에는 하나님의 응답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든지”소유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2) 하나님은 우리보다 현명하시며 그는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것과 우리가 그 당시에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를 식별하실 만한 능력을 갖고 계신다. 어느 여름날 나는 거의 매일 뱃사람과 조그마한 배를 탔다. 그는 훌륭한 집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운전하는 게 그렇게도 좋았다. 9월이 닥쳐 왔을 때 나는 아버지께 뱃사람과 함께 일하기를 항상 소원해 왔으며 학교에 돌아가고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고 말씀드렸다. 만약 그때 나의 아버지께서 “좋아,네가 그렇게도 원하던 것을 하고싶어하니 네 좋아하는 대로 하렴”이라고 말씀하셨다면 어찌될 뻔 했겠는가? 그는 나보다 현명하시기 때문에 나의 일시적인 변덕과 내 마음의 진실한 갈망사이를 식별하실 수 있었다. 그는 나의 원하는 것을 거절하셨으나 그것은 타고르가 말한 것과 같았다. “주님은 완전히 거절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셨다.”

(3) 하나님은 그의 모든 자녀들에게 관심이 많으시며 나의 “무엇이든지”가 나 이외 다른 사람의 기도와 상치될 때,하나님은 사랑과 지혜가 무한하심으로 마땅히 응답하셔야 할 기도에만 응답하신다.
얼마 전에 비행기 예약 관계로 전화를 했었는데 여분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 기도했으며 이튿날 그들은 나에게 자리 하나를 남겨 놓았다고 전화상으로 연락을 주었다. 나중에 나는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을 때였다. 예약석을 얻을 수가 없어서 공항에 곧장 나가 좌석 얻기를 기도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나를 도와달라고 매우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러나 그 비행기는 나를 싣지 않고 이룩해 버렸다. 하나님은 나 말고 다른 어떤 사람을 태우시기로 조정하신 것이다. 이런 경우 그것은 과히 유쾌하지 못할 것이다.

(4) 미국 애국가의 몇 구절을 유의하여 보아라.
“우리는 가는 길 의롭다면
그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
‘하니님 우리 주 피나처니’
이것은 우리의 모토일세”
우리는 “무엇이든지”는 의롭지 못할 때가 흔히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기도하신 말씀을 유의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여기에 약속이 주어진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그것이 참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이라면,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목적과 뜻에 일치하는 것이라면,그대로 이루어지리라.”
우리는 적어도 이런 확신을 가짐으로써,두려움이 아니라 담대한 마음으로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치 지음 일부 내용 발췌

기도의 방법

기도의 방법

“주여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11:1)라고 제자들이 에수님께 물어 보았다는 사실이 약간은 이상스럽게 생각될는지도 모른다. 이 사람들은 분명히 엄격한 종교적인 가문에서 성장했을 것이다. 이들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교회에 줄곧 다녔고 기도를 해왔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제자들의 이 질문이 있기 1년 전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라고 물어 보았다면,그들은 매우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대꾸했을지도 모른다. “아니,그걸 말씀이시라고 하세요.우리는 수년 동안 거의 매일 같이 시간을 내어 규칙적으로 기도해왔는데 그것 하나 모른단 말씀입니까?”

제자들은 아마 당신에게 성경 속에 있는 요절들을 인용해 가며 입이 닳도록 답변했을 것이다.그들은 아마도 기도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을 하고 또 기도해야 할 이유를 타당성있게 설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막상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기네들이 참으로 기도할 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얼마나 많이 기도하셨는지,그리고 이 기도가 주님의 생애가운데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수차에 걸쳐 기도하러 나가시고 들어오시는 것을 보았다. 기도가 제자들에게는 형식에 지나지 않았으나 주님께서는 능력이 있었다.

이 제자들이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주님의 기도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기도해 왔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들은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자신들이 참으로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여,우리에게도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간청했던 것이다. 그들이 간청했던 것은 이날 이후부터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제자들의 간청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즉 기도할 때의 첫 단계는 이러하다. 먼저 당신은 하나님을 믿고,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켜야 하고,당신이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인지해야 하고, 당신의 마음과 생각에 성령의 충만함과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 문호 톨스토이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부유했고 존경받았으며 사방에서 칭송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이때까지 인생의 죄의 두려움에서 자유를 얻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해왔으나 이제는 그 모든 두려움이 그를 괴롭혀 잠시도 안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느날 그는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한 농부를 보고서 그의 얼굴에 비친 평화와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이윽고 톨스토이는 중얼거린다.”이 농부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 이다지도 기뻐하누나” 그는 잠시 동안 그 농부를 응시한 후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자이기에 기쁨을 지닐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도 하나님을 만났으며 그때부터 마음 속에 쌓였던 불만족과 고민을 해결한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체득한 결과로서 다음과 같이 위대한 결론을 내렸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인생을 아는 것이다.”

기도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수용적인 마음으로 기도해야 함을 의미한다.
당신은 아침에 그날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어난다. 당신의 생각은 활동적이고 공격적이며 매 시간마다 직장에서,과외활동에서 생각과 시간과 정력을 소비한다. 그날 밥 당신은 음악 연주회에 참석한다. 그러나 당신이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기분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음악 연주회라면 공격적이고 활동적인 것보다 수용적이 되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를 시작한다면 수용적이 되어야 한다. “잠잠하라 그리하면 내가 하나님임을 알리라.”고 시편 기자는 말하였다.

기도의 첫 단계는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공격적인 마음을 수용적인 마음으로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대부분 “이것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것이고 저것은 내가 하려고 작정한 것이다.”라고 기도하는,이를테면 기도를 하나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부차적인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기도는 여분의 타이어에 지나지 않으며 다른 타이어가 못쓰게 망가졌을 때 사용코자하는 기타의 어떤 것에 불과하다.당신은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하면서 당신이 바라던 것을 얻지 못하고 결정한 일을 할 수 없게 될 때 “하나님 제게 저것을 주십시오” 혹은 “하나님,제가 저것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기도를 기업정신으로 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방법으로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신다. 예를 들면, 어느 좋은 날 아침 일어난 당신은 매우 기분이 상쾌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다. 당신은 횟바람을 불면서 그날 일어날 좋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것에 대해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감사는 누구에게 한 것일까? 하늘에 대해서인 가? 그것들은 당신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가족과 친지들에 대해서 감사했겠는가? 그들은 당신에게 많은 것을 의미하지만 당신의 삶의 깊은 면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 자신에 대해서인가? 당신이 당신 자신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당신은 찬사를 표현하는 것이지 수용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로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비극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 왔다고 하자. 대부분 우리의 첫번째 반응은 원망이다. 우리는 “이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나는 이것을 원망합니다. 내가 이런 곤욕을 당해야 함은 부당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벽을 향해서 말을 했다고 한다면 벽은 사람이 아니기에 말을 들을 수가 없다. 어떤 친구에게 생각을 표현한다고 하지만 그 사람에게 실제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사람이 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능가하는 어떤 능력이 우리 일상 삶 속에서 역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다. 누군가가 우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부끄러워 하는가?
그럴 수도 있지만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사람들이 보고 있지 않았지만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여전히 부끄럼움을 느낀다. 우리가 발각되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밖에 어떤 분으로 인하여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들어오셔서 자신을 인지하게 하신다.

능력의 역사는 우리의 마음을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열고 그의 존재에 대해,성령에 대해,음성에 대해,뜻에 대해 수용적이게 한다.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시는 줄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가를 아시느리라”고 말씀하셨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많은 말을 하는데 있지 않다. 먼저 예수께서 말씀하셨던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참으로 기도하는 마음은 힛티어가 마음 속에 생각하고 있던 바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던 것과 같다고 본다.

우리의 온갖 수고를 다할 때까지
주님의 고요한 음성을 들으라.
우리의 정한 생명 다할 때까지
주님의 평안한 모습을 보아라.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켜 기도한다면 두가지 결과가 따라 나올 것이다.

첫째로,그렇게 하는 기도는 부정적이 아니라 적극적인 결과를 가져다 준다. 어떤 사람이 수차에 걸쳐서 나에게 “나는 기도했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했어요”라고 말했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어떤 버릇을 고치기 위해,어떤 곤궁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할 때 아무 것도 못했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아파서 낫기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자.그 사람은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저는 지금 몹시 아파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보기에는 그렇게 아픈 것 같지 않은데”라고 말씀하신다면 “아니어요,주님은 제 사정을 잘 모르셔요. 제 이마를 한번 만져 보셔요. 그러면 저의 체온이 어떠한지 아실 거여요. 저의 맥박을 짚어 보셔요. 그러면 제가 얼마나 허약한지 아실 거여요. 저는 앉아 있고 싶지 않아요. 먹은 것은 모두 토해내고 싶어요. 저를 낫게 해 주시고 건강을 되찾게 해 주셔요”

이러한 종류의 기도는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없게 한다. 당신 생활의 좋지 못한 버릇을 이렇게 적용시켜 보라. 당신이 이런 식으로 기도하면 할수록 그것은 당신 생각 속에 굳어질 것이다.만약 어떤 사람이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시작한다면 그는 마음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히 받을 것이다.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히 받을 것이다. 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삶의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체험할 것이다.

둘째로,하나님이 우리 기도의 모든 것이기에 우리는 낙심치 않고 기도한다. 우리가 낙심하게 되는 이유는 소망을 잃었기 때문이며 소망을 잃은 이유는 하나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은 모든 문제를 능히 해결하실 능력을 갖고 계시며,하나님은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쟁취하실 능력을 갖고 계신다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좋은 기도의 모본인 시편 23편을 한번 살펴 보자. 거기에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위를 믿는 아홉가지 간구하는 말들이 있다. 다윗은 그의 생애에 문제와 약점이 많았다. 그는 때때로 어둡게 보이는 세상에,살고 있었으나 긍정적인 기도를 드렸다. 그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그리고 그의 존전에 있음을 인지했다. 다윗은 기도를 마치면서 두 가지 결론을 내린다. 첫째는,내일은 좋다는 것이다.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그는 기도한다. 둘째로,내일이 지난 다음에도 역시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여호와의 집”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읽어 보아라.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며 낙관적인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한다.그것은 하늘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함을 보여 주며 우리의 일용할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해 주신다는 것을 믿게 해 준다. 우리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시험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이다.

무어 주교는 고층빌딩 창문에서 뛰어내려 투신 자살한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였다. 그 빌딩 문지기인 늙은 흑인 자살자에 대해서 그 주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렸을 때에는 자살하는 게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지요”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흑인이 하나님을 찾았다면 해야 할 그 밖의 일이 있었을 것이다. 어제가 아무리 불행했고 오늘이 어쩌고 해도 하나님과 함께한 내일은 좋을 것이다.기도에서 첫번째의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그것은 톨스토이가 말한 대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생을 아는 것이다. “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내용 발췌

기도에 용기를 주는 것들

기도에 용기를 주는 것들에 대해 알아 보자

다음에 나오는 것들은 나의 생애와 기도 생활을 풍성하게 했던 항목들이다. 이 항목들은 당신의 기도 생활에 새로운 가능성을 심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경 읽기와 기도를 위해서,당신에게 주어진 날 중에 가장 여유있고 좋은 시간을 떼어서 바치라.성경 읽기와 기도를 하기 위해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황금 시간을 바치라는 것이다. 잠 자기 전 몇 분을 대강 바치는 것은 이러한 중요한 사역을 하는 데에 적당치 못하리다.

일반적으로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 말씀을 읽으면 바람직할 것이다. 말씀을 읽음으로 당신은 기도하기에 좋은 마음가짐을 갖게 될 것이다. 이따금씩 하나님은 말씀을 읽는 자의 마음을 격동시켜서 당신의 기도가 열정적으로 상달되도록 한다.

기도의 시간은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만 통하도록 은밀하게 하라.합심 기도는 역사하는 능력이 있으나 이것이 개인기도나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통은 대신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친히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다. 그는 수없이 아버지와의 기도 시간을 홀로 보내셨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기도를 그날의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로 여겨라.만약 우리가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기도 사역에 몸 바치고 있는가를 의심해 보아라. 만약 나에게 이 땅에서 단 하루가 남겨져 있다면 그리고 이 하루를 가장 값있게 보내고 싶다면,하나님께서 특별히 어떤 것을 하라고 인도하시지 않는 한 하나님과 기도하면서 그 하루를 보낼 것이다.

한날을 온전히 기도하라. 당신은 일을 하면서 혹은 기다리거나 길을 걸을 때, 잠시 잠깐이라도 기도하라.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져와 그에게 온전히 맡기라. 그러면 그가 이루신다. (시 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 우리가 맡기고 신뢰하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가로 5인치,세로 3인치 정도의 규격으로 된 작은 카드나 노트로써 기도목록표를 만들라.당신이 기도한 날짜를 기재하여라. 당신의 기도가 응답되었으면 응답받은 기도를 통해서,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도 목록표로 인하여,우리의 진실한 믿음은 돈독해지며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간증이 되는 것이다.

당신의 요구사항을 명백히 하라. 요점이나 목적없는 흐릿하고 막연한 기도를 중언부언 드림으로 당신 믿음을 사장시키지 마라. 세목을 따라 기도하라. 그러면 당신의 믿음과 기쁨은 급속도로 성장한다.

기도모임에 참석하라. 그룹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개인기도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면 단체기도는 한층 더하다.

기도에 관한 훌륭하고 영감있는 서적들을 읽으라. 기도와 관련된 책들로서 내가 읽은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소책자는 토레이가 지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이다. 이 책은 다른 어떤 책보다 나로 하여금 기도를 많이 하게 했다.
또 하나 훌륭한 책이 있다면 라이스가 지은 [기도,간구 그리고 응답]이다. 죠지 뮬러가 지은 기도의 응답 또한 추천할만하다

기도하여 받은 응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져라.축복이 넘쳐 흐름은 단지 우리에게서 단절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다윗은 말한다. “내가 큰 무리들 중에서 주의 기사를 선포하리이다.”

무엇보다도 기도하고 싶은 감동에 순종하라. 사탄이나 육체는 결단코 당신으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역사하지 않음을 기억하여라.만약 당신에게 기도하고픈 마음이 생긴다면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인줄 알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도하여라.“이 세상이 창작해낸 것보다 기도로 말미암아 되어진 역사가 더 많다.”란 말은 아직도 참이다.

“내가 지극히 높은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시 57:2)

맡기는 기도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시편 37:5)

맡기는 기도는 업무처리를 할 때의 그것과 같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문제를 완전히 맡기는 것이며 그가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신뢰하는 것이다. 결과에 대해서는 다만 그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우리는 ‘맡기고신뢰하는‘ 것 뿐이나 주님은 ‘일을 하신다‘이것은 훌륭한 진리이며 그것은 실제로 역사를 일으킨다.

그것은 인간의 매일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서도 적용된다.
만약 한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기에 체포되어 구금된다면 그에게는 변호사가 있어야 한다. 변호사는 그에게 확신시키기를 그의 소송을 자기에게 완전히 맡기고 신뢰하면 자기가 해결해 줄 것이라고 한다. 피곤인이 초조해 하거나 걱정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결과는 소송사건에 한번도 져본 적이 없는 유능한 변호사의 손에 달렸다. 이와 같이 그가 맡기고 신뢰하면 그의 변호사가 그를 위하여 해결해 준다.

한 사람이 심장병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는 이 병을 세계적으로 알려진 심장병 전문의에게 맡기기로 한다. 그 외과 의사는 여러 경우 심장이식을 성공적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그 의사는 그에게 안심시키기를 만약 그가 이 병을 완전히 의사의 손에 맡기고 신뢰하면 그는 새로운 심장을 가짐으로 완치될 것이라고 한다. 이 경우 병든 자가 외과의사를 도우려고 한다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다.이처런 그 사람이 맡기고 신뢰하기만 하면 유능한 의사가 그를 성공적으로 치료해 줄 것이다.

우리가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거나 넘겨 버릴 때 우리는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그 문제가 결론에 이르기 전에 확신에 가득차서 우리의 역활 – 맡기고 신뢰하는 것 – 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역활 – 일을 이루시는 것 – 을 틀림없이 하시고야 만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위하여 행하시는 것을 통해서보다 자신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역사를 통해서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가 맡기는 기도로 기도하면 우리는 맡긴 그 문제를 인하여 더 이상 계속해서 간청하지 않는다. 우리가 확실히 믿기로는 하나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셨으며 그 일은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에 따라 이루어질 것이다.

당신이 이런식으로 기도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맡긴 것을 잡으려고 되돌아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 것을 위하여 또 다시 기도하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픈 모든 유혹을 단연코 무리쳐야 한다. 당신이 맡긴 것은 이제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그는 일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당신이 맡긴 것을 생각하는 때에 그것을 얻기 위하여 또 다시 기도하지 말고,일을 하고 계시는 그에게 감사를 돌려야 한다. 비록 그것이 아직 응답받지 못했다손 치더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역활을 하실 거라고 확신해야 하며 당신은 믿음으로 미리 앞질러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혹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받으면,그 문제를 하나님께 당장 맡겨버리고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해야 한다. 그는 분명히 그것을 완수하실 것이다.

농부가 예상하는 수확을 얻기 위하여 씨앗을 땅에 심을 때에 그는 씨앗이 발아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며칠 사이에 한번씩 땅을 파서 씨앗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가 그렇게 한다면 수확은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는 노동의 대가를 얻기까지 인내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소망 가운데서 기다리며 물을 줄 것이다. 마침내 시간이 경과하면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계획을 하나님께 이루어 달라고 맡겨 버리면 그것이 즉각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초조해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의 약속이 신실하다는것을 안다. 그는 말씀하셨다. “내 손에 맡겨라 그러면 내가 이룰 것이니라.” 우리는 씨앗이 발아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땅을 파 보지 않는다. 우리는 맡기고 조용히 신뢰한다. 그가 일을 하고 계실 때,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때에 완전히 성취시켜 주시는 것을 알고 그를 찬양한다.

7년 전에 나는 어떤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서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믿음으로 나는 마가복음 11장 24절 말씀에 따라서 두 눈을 고침받고 그것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감사드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내 눈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끼지 않고서 나는 일상적인 활동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내가 아직까지 보지 못하는 어떤 장벽이 가로 막혀 있을지라도 나는 믿음으로 행할 때 변화가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내가 ‘맡기고”신뢰했던’ 1973년 2월 18일 오후 3시의 일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주님의 손에 맡길 것이다.
나는 그가 일하시고 계심을 진심으로 믿는다. 그는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는 동안 나는 믿음과 시련이 금보다 더 귀하게 되어 내가 수확을 기다리는 동안 금을 쌓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맡기는 기도는 문제를 전가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문제를 우리의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전가시킨다.
그리고서 우리는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문제를 전가시킨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한다.
그는 그의 말씀에 신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역활을 이루신다.그는 “너희는 맡기고 신뢰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것을 이루어 주리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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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다려라.인간들이 너무나 조급하고 건방지고 분을 잘 낸다. 그것은 큰 실수이다. 모든 것은 기다릴 수 있는 자에게만 찾아온다.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니라.’당신은 여호수아가 아직도 손년이었을 때 가졌던 능력과 지혜와 축복의 환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실제로 깨닫지 못한다. 당신이 세우는 모든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모든 문은 닫혀져 있는 것 같다. 세월이 흘러가고 당신은 세상에서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한채 절망에 사로잡힌다.이제는 당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의 뜻을 받아들이고 당신 꿈의 실현을 위해 그에게 맡겨 버려라.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 애가 3:25~26) — 작자 미상 —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

상을 받게 하는 기도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6:6)

이렇게 단순한 약속을 상기함으로 나는 매우 쉽사리 기도할 자극을 받는다.
우리 하나님은 은밀하게 기도하는 것을 보시고 갚으실 것이다.나는 또한 비슷한 성경 구절인 히브리서 11장 6절의 말씀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반드시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를 생각 해 본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찾으면 상이 주어진다. 이 약속은 우리가 요구하는 여러가지 조건들과 뭉쳐있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우리 아버지께 은밀하게 기도하면 그는 우리에게 갚으신다.

우리에게 아직 고백하지 못한 죄나 완고한 버릇 같은 영적인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기도할 때까기 해결받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상은 심령의 부흥과 청결함이다. 부지런히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급은 주어진다.

당신은 매일 하나님과 은밀한 시간을 갖고 있는가? 당신이 만약 매일 은밀한 기도를 드린다면 당신의 생애는 급속히 달라질 것이다.당신이 만일 당신 생애에 혁신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내일 아침에 조금 더 일찌기 일어나 홀로 하나님 말씀과 기도에 얼마의 시간을 보내라.당신이 이것을 습관적으로 계속해 나갈 때 당신은 얼마 안가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급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급작스레 소란스럽게 오지 않으나 당신이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묵상할 때 조용한 혁명이 시작되고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 나는 한 선교사 친구와 함께 고아원 설립의 가능성을 조사하기 위해 구 멕시코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아침 6시에 나의 집으로 나를 만나러 오기로 했다. 나는 그날 일찌기 일어나 준비를 했기에 몇 분 간 여분의 시간이 있었다. 나는 마태복음을 몇 장 읽으려고 생각했다. 나는 1장 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친구가 내 집에 도착하기 전 30분도 못되는 시간에 나는 15장까기 읽었음을 발견했다.
불과 30분만에 이렇게 많은 부분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나에게는 계시인양 생각되었다. 나는 한달 동안 신약성경 모두를 읽어 보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일년 동안 매달 한번씩 신약성경을 통독하려고 마음먹었다.

나는 나의 성약성경이 몇 페이지가 되는지를 조사해 보고 그것을 30등분으로 나누었다. 나는 한달에 신약을 통독하기 위해선 16페이지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지난 여러달 동안 이렇게 해왔으며 나의 발걸음은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새로운 차원에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내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럴수록 나는 더욱 많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다.

어떤 사람은 바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될 때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우리들 중 대부분이 배워 온 바는 당신이 기도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당신은 주어야 하고 자기를 낮추어서 남을 섬겨야 하지 어떤 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아무 상급도 약속하지 않았다면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 속에서 분명히 약속 받았다면 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다.
기도는 상을 받게 하는데 그 이유는 기도가 하나님께 영적인 견지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물질세계에 있는 특수한 것들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말씀은 손에 손을 잡고 나아간다.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루리라”(요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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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그의 고난과 죽음 – 그것은 모두 기도로 점칠된 것이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였으며,하나님을 신뢰했고,하나님께 맡겼던 것이다. 믿음의 형제들이 받은 구속은 주님의 기도와 도고에서 나온 구속이다. 그대들의 주님은 기도하는 주님이다. 그대를 위해 살았던 생애,그대 안에서 살았던 생애는 기도하는 생애였으며,그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에게서 모든 것을 받아 누렸다.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가 직접 기도하는 것과 같은 기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시요 구주이시며 우리의 생명이시기에 우리의 유일무이한 모본이 되신다. 그의 신성과 영성 때문에 그는 우리 안에 거하실 수 있고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그 안에 그가 우리 안에 거할 때 말이다. – 앤드류 머레이-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

기도와 금식

기도와 금식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마태복음 9:15)

때때로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하는 중에는 기도와 금식을 동반하는 때가 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금식하는 바리새인 식으로 금식하지 말고 주님께서 가르치신대로 해야 한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마 6:11~18 참고)

예수께서 은밀하게 아버지께 기도하는 자들에게 상과 복을 주신다고 하신 바로 같은 항목에서,그는 은밀하게 아버지께 보이기 위하여 금식하는 자들에게 상과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매우 빈번히 신 구약 성경에서 기도와 금식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최초의 선교사들은 기도와 금식 이후에 파송되었다.(행13:2~3)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지 못하는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만 갖고 있다면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기도와 금식이 아니고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 17:20-21) 바울은 결혼한 부부들에게 때때로 기도와 금식을 하라고 권고하였다.(고전7:5) 금식을 동반한 기도는 바울이 세웠던 초대교회에 행해졌다. (행14:23) 역사를 통하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금식을 동반한 기도를 하였다. 존 웨슬레,찰스 피니,앤드류 머레이,토레이,그리고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금식을 동반한 기도를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고무시켰다.

우리가 당연히 먹어야 할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하겠다.
굶는다는 데에 어떠한 특별한 능력이나 공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금식을 통해서 나오는 능력은 놀라운 것이다.!

몇해 전에 나는 성경에서 금식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을 모두 연구해 보았다.
나는 거기서 성경시대의 사람들이 큰 고난의 때에,슬픔의 때에,하나님의 구원의 필요를 심각하게 느끼는 때에,특별한 문제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랄 때에,죄를 통회하고 자부하는 때에 금식하고 기도했던 것을 발견해 내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으로 부터 특별한 축복을 구할 때 혹은 긴급한 도움을 구할 때 금식했다.

은혜의 시대에는 금식이 필요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바울,베드로,그외 여러 성도들ㄹ이 금식기도를 드린 것을 알 수 있고 그래서 우리는 금식기도로 말미암아 거룩한 복을 받는다는 점을 알게 된다.
금식이 건강을 해친다는 두려움 때문에 어떠한 기독인들은 금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은 그 반대가 맞다. 육체가 가장 건강할 때는 금식할 때이다. 우리 인체는 소각기를 지니고 있는데 다만 음식을 소화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기회를 주면 불필요한 지방질이나 찍꺼기,독한 성분을 소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금식하기 시작한다면 일반적으로 소화기관은 소각기관으로 탈바꿈한다. 24시간의 금식만이라도 소화기관을 쉬게 함으로써 몸에 큰 유익을 가져다 준다.

셀톤(Herbert M.Shelton)은 그의 책 [당신의 생명을 살리는 금식][Fasting Can Save Your Life)이란 책 머릿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난 45년 동안 건강했던 자로서 금식 해 온 나는 나의 체험과 연구와 관찰을 근거로 하여 이 책을 저술했는데 이것의 목적은 진정한 금식이란 건강을 증진시키고 유지시켜 주며 고통을 제거시켜 주고 몸무게를 줄이거나 억제시켜 주며 인간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금식해야 할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성별시키고 하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모든 것을 받기 위해서이다.
금식은 일종의 기도의 형태이다. 그것은 기도의 긴급성과 능력을 더하여 준다.
성경상에서 기도만으로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한 예는 있으나 금식을 동반한 기도의 응답 못받았다는 예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다. (사사기 20장을 보라)

몇주 전 한 청년이 나에게 와서 자기의 영적 생명은 도무지 자라지 않았다고 불평을 늘어 놓았다. 그는 침체상태에 처해 있는 것같아 보였으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지 않고 있었다.
무언가 문제에 처해 있으나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보였다. 우리는 기도했으며 주님께서 나에게 권고의 말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얼마의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서 당신은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일주일이 채 못가서 이 청년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유용성과 효용성 가운데서 성장하였다.

금식과 기도 중에 하나님 기다리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앞길에 놓여 있는 영적인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금식의 방법

금식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 어떤 음식이나 식사를 하지 않는 부분적인 금식이 있다. 다니엘은 21일 동안 부분적인 금식을 했으며 그래서 그는 떡이나 고기나 포도주를 먹지 않았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나의 친구 중의 하나는 28일 동안 점심을 먹지 않았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교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은 규칙적인 금식이 있으며 이것은 일주일 중 하루나 이틀간 규칙적으로 금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신자들은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고 매일의 가정 제단이나 기도시간을 위하여 시간을 제쳐둔다.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한 성경교사는 그와 그의 부인이 일주일 중 어느 하루를 정해 놓고 금식하는데, 이 특수한 날이 되면 전혀 식욕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육신은 그날에 음식을 먹지 않아도 잘 견디어 냈으며 규칙적인 금식에는 어떤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지 아니하였다.

보통 금식이 있는데 이는 정한 기간 동안 모든 식사를 중지하고 오직 물만 마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체험하셨던 금식의 종류이다.(마태복음 4장)

금식 단계에 나타나는 증상

완전 금식은 여러 날 혹은 몇 주간 동안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장기 금식을 말한다.
이 금식에는 4단계가 있다.
(1) 첫 몇일 동안 배고픔이 극에 달한다.
(2) 다음 단계는 메스껍고 지겨운 단계이다.
(3) 세째 단계는 힘이 솟아나는 때이다.
(4) 마지막 단계는 참말로 배고품이 생긴다.
완전 금식은 길이에 있어 10일에서 40일까지 매우 다양하다.

완전 금식에 들어가기 전에 왈리스가 지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금식]이란 책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당신이 장기 금식을 마친 후에 정상적인 식사를 다시 할 때 합병증이나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그 금식을 어떻게 중단하는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나는 당신에게 이러한 신령한 금식 훈련을 시도해 보라고 간절히 권면하다.
그것은 예수 안에서 신령한 영적 체험을 진작시킬 뿐만 아니라 당신 육신에게 건강과 정력을 더하여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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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에 대해,인간에 대해 정복할 수 있는 모든 실제적인 능력은 골방에서의 기도를 통하여 주어진다. 하나님과 함께 은밀한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은 악을 정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투쟁할 만큼 강력하게 된다그들은 그의 말씀을 따르며 그의 길을 배우는 겸손한 자들이다.그들은 타인들에게 그에 대해 말을 하며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는 그의 선지자들이다. 그들은 시대의 징조를 분간하고 그의 지시하심을 드러내며 그의 알리심을 알아낸다. 우리는 종종 사바나룰라나 카타린과 같이 하나님과 영교를 주장하는 자들을 신비주의자로 생각한다.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수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이 많은 남녀들이 자신들의 삶으로써 증거하지 않았는가? 그들은 죄를 짓지 않았으며,하나님께서 누구도 알수 없는 어떠한 길로 그들을 인도하셨다는 것을?
– 피어슨 –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

믿음으로 하는 기도

믿음으로 하는 기도란 무엇인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1:22)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니 그것은 그 즉시 말라 죽었다. 제작들이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 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그는 언제나 믿음을 높이신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믿음의 말씀을 하셨으며 무화과 나무조차 순종하였다. 그는 바람과 바다에게도 말씀하셨으며 그들도 순종하였다. 우리가 이와같은 종류의 믿음을 갖고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난다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당신은 이러한 믿음의 말을 사용할 만큼 믿음이 충만하지 못할지 모르나 예수께서는 우리도 믿고 구하면 똑같은 결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믿음의 기도로 기도할 수 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될 때 증가한다.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안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 분과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약속의 말씀을 알아야만 한다. 믿음은 가장한 것은 아니다. 믿음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는 행위이며 약속을 의지하는 것이다.
“너희 성도들아,그의 지존하신 말씀 위에 너희 믿음을 둠이 얼마나 굳건한지를 알지어다.”
만약 우리가 큰 것을 구할 만큼 믿음의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면,보다 조그마한 것을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 믿음의 기도에 응답하시면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보다 더 담대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믿음을 갖고 큰 것도 구하게 되는 것이다. 믿음은 자라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그마한 것들을 위하여 믿음으로 기도할 수가 있다면,이윽고 우리의 믿음이 커짐을 깨닫게 될 것이며 우리에게 무척 어렵고 대담한 것들을 위하여서도 하나님께 구하는데 구애받지 않을 것이다.

어느날 나는 마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기도에 관해 묵상하는 동안 이전에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떤 것을 발견하였다. 나는 이 말씀의 약속에 동사 시상을 살펴보고서 한층 더 힘을 얻게 되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이렇게 기록되었다.”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이 구절에서 “그러므로”란 단어는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말하면 기적을 보게 된다는,앞서 나온 말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예수께서는 믿음의 말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다른 장소로 옮기셨다. 이제 그는 믿음의 기도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지 기도하면(현재 시상) 받는 줄로 믿으라 (미래 시상) 그리하면 이루어 지리라 (미래 시상)
언제 내가 그것을 받은 줄로 믿는가? 내가 기도할 때 받은 줄로 믿는다.(현재 시상). “그대로 되리라”는 미래 시상이다.
나는 내가 경험상으로 받기 이전에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다.나의 친구가 한때 이르기를 “너가 그것을 받기 전에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다. 사실상 이것이야말로 믿음의 본질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미래 시상)(히11:1)
그러나 내가 이 약속을 말하고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원수는 나를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것에 관해 나에게 이렇게 가르치신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그는 또한 히브리서 6장 12~15절의 말씀을 통해서도 가르쳐 주셨다. “너희가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저가 (아브라함)이 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리라.”


그러므로 나는 믿음의 기도와 약속의 성취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당황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보다 큰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며 이는 아름다운 가르치심의 순간이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없어질 금보다 귀하다.” 그것이 귀하다면 그것은 정녕코 가치가 있음을 이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베푸시는 때 즉 내가 믿음으로 간구한 때와 실제적으로 응답받은 때 사이에 역사하신 모든 것을 인하여 자족함을 배운다.


금식과 기도를 위하여 하루를 떼어 바치라.그것은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데 특별하게 도움이 된다. 나의 육체가 정복되도록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맡기고 그의 영광을 위해 열정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간절히 사모하고 열망하라.밤이 깊어지자 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뜨겁게 간구할 수 있었으며 이날이야말로 내가 이전 어느 때 가졌던 날보다도 가장 유익한 하루였다고 할 수 있었다. 저녁 때쯤이면 나는 기도에 대해 큰 자극을 받아 좀처럼 그만둘 생각을 갖지 못했다. – [에드워드 페이손] 지에서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