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음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고통의 문제이다.”어찌하여 이것이 나에게 왔단 말인가?” 우리는 수없이 되풀이하여 묻고 있다. 왜 육신의 질병이? 왜 불구자가? 왜 저 사람이 죽었는가? 내가 왜 실패를 맛보아야 하는가? 우리의 육체에,우리의 정신에,우리의 심령에 고통은 가지가지로 산적해 있다. 왜 그것이 그러한 식으로 찾아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다음의 여러가지 적극적인 면모를 살펴본다면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1) 모든 종류의 축복은 고통을 동반한다. 한 실예를 들어보자. 나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로울러 스케이트를 몇 개 샀다. 나는 스케이팅을 하면서 기쁨을 만끽했으며 어린이들에게도 즐기게 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스케이팅을 할 때 넘어져서 다칠 위험도 다분히 도사리고 있다.

나는 그들이 스케이트를 타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딱딱한 콘크리이트 바닥에 넘어져서 다치고 울곤 하였다. 그러한 예에서 내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당신은 말하겠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스케이트를 줌으로써 그들의 일과에 기쁨과 즐거움의 가능성을 증가시켜 주었다. 그들에게 스케이트를 줌으로써 다칠 것을 허용하였지만 그것이 나의 본 뜻이 아니었다. 내가 만약 밖에 나가서 콘크리트 바닥에 그들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한 소년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비록 그의 아버지가 차를 몰도록 허용은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죽이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허다하니 나는 너에게 차를 운전하거나 차 타는 일을 금지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소년에게 교통의 유익한 편리한 점을 들어 운전을 허용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놀라운 것들을 주신다. 사랑이란 것을 예로 들어보자. 사랑은 인생에 있어 최대의 축복이지만 그것은 또한 인생 최대의 고통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남녀에게 서로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우리 인간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민다. 우리의 가정에 자녀가 태어나면 새로운 사랑이 가슴 속에서 싹튼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자에게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우리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을 위하여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꿈꾸고 소망하고 사모하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꿈은 성취되지 못하고 바라는 것은 물거품처럼 되어버리고 야망은 좌절된다. 그때 우리는 절망과 좌절의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된다. 한편 우리는 성취하는 괘감을 맛보기도 한다. 한 사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떠한 팀이 경기를 하려고 야구장에 나갔다고 하자. 그들은 최선을 다해 보았으나 패배를 당했고 그것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만약 그 패배로 인한 고통을 피하느라고 경기를 하지 않다면 그들은 패배를 모면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아울러 이길 기회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이 경기를 한다면 이길 가능성과 질 가능성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인생을 연구해 보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것이다. 선과 악, 길고 짦음, 강하고 약함,뜨거움과 차가움, 흰 것과 검은 것, 기쁨과 슬픔등이 있다. 전자의 존재함은 후자의 가능성을 배재하지 못한다. 고통이 없다면 기쁨도 없을 것이다.

(2) 현생에서의 고통과 슬픔은 우리가 인간세계에 속하기위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이다. ‘무죄한 자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이 문제는 우리에게 두고 두고 제기된다.

인간은 이 땅 위에 재판제도를 이루어 놓았다.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있고 어떤 사람이 범죄 사실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면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 범죄 사실이 드러나면 범죄 정도에 상응한 벌을 받는다. 우리는 법정이 무죄한 자에게는 벌주지 않는다는 점을 안다. 그러나 인생에게는 그와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죄란 금생과 내세에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한 자들중에는 무죄한 자도 있었다. 이 땅 위에서 아무 죄없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았는데 그들의 아들과 딸이 전전긍긍하므로 그들의 간장은 애가 끓는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 중에 고통에 못이겨 병석에 눕는 이가 있다. 가장 성결하게 살았던 이들 중에 낙심천만한 처지에 떨어지는 자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자 자기가 저지른 정도에 따라서만 고난을 받게 하는 것으로 세상을 이루어 놓으셨다면,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쁨도 제한 받아야만 한다. 당신의 생활 주변을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은 타인의 수고로 말미암아 누리는 잇점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병들어 누웠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면 의사도 부를 수 없다. 입원할 만한 병원도,간호해줄 간호원도 없다. 뛰어난 전문의가 발명해 낸 약품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죽어도 묻히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축복을 누린다. 또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많은 고난을 당한다.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제가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요?” 대답은 ‘묵묵부답’이었다. 당신은 축복도 받을 자격이 없다. 그것은 인간 누구나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상호간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신비스러운 일을 보았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히 간섭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는가? 나는 어떤 사람에게 기도를 해주었더니 감쪽같이 응답이 왔다. 나는 어제 자궁암으로 고생하는 한 부인을 위해 기도했더니 즉각적으로 그 고통은 사라졌으며 그 여자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때도 별차도가 없었다. 왜 누구에게는 나타나는데 누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3) 하나님은 우리 생애 가운데 몸과,마음,심령의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하였다.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시147:3,4)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생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직접 역사하시어 고통을 제거하신다. 때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 당신이 부모라면 자녀가 소아마비에서 고침받기를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모두 응답하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고통을 제거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써 응답하신다.
나는 한주간 동안 카롤라이나 북부 월밍톤에 있던 적이 있었다. 어느날 오후 해변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거기서 파괴된 장면을 보았다. 오래지 않아 폭풍우가 그 해변을 강타하여 수백채의 가옥을 무너뜨렸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산산 조각이 나 있었으나 그러한 가운데에도 전혀 요동치 않고 서있는 집들이 많이 있었다. 집들 중에 얼마는 값싼 재료로 아무렇게나 지은 집이었으나 얼마나 폭풍우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지어져 있었다.

인생의 일어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인생의 모든 폭풍우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때를 얻고 고난을 모면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그의 은혜를 인하여 우리도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스마트 박사는 어린 꼬마 소녀를 의사에게 데리고 온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기의 눈꺼풀을 잘라달라고 했다. 의사는 몇 바늘 꿰매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어떤 이유로든 마취제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꼬마 소녀에게 바늘을 사용할 때 뛰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기를 “네,아빠가 제 손을 잡고 있으면 그렇게 할래요.: 그러고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꿰매는 바늘 숫자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경감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빠가 거기에 보이지 않는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같은 간단한 실예는 수많은 하나님 자녀들의 체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손을 잡으시는 강하고 현명하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 아무리 길이 멀고 험해도,어둡고 고통스러워도,눈깜짝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잔잔한 평화,빛나는 승리를 발견한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