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삶을 벗어나는 방법

어차피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다.

삶은 고해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 중의 하나다.
이것이 위대한 진리인 까닭은 진정으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삶이 힘들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힘들다는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대신에 드러내 놓고 또는 은근히 자신이 지닌 어려움 걱정 문제가 엄청나다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그들은 마치 삶은 기본적으로 편안한 것처럼 다시 말해 삶은 응당 편안해야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이 특별히 자신이나 가족 부족,계급,국가,인종 혹은 인간에게만 들이닥친 유례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놓고 또는 은근히 발설한다.
나 자신도 그래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평이 어떤 것인지 안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저 불평하고 싶은 걸까
우리 아이들에게 이 문제들의 해결 법을 가르치고 싶은 걸까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는 훈육이다.
훈육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부분적인 훈육으로는 일부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
온전한 훈육이 있어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어떤 문제냐에 따라 절망 비애 슬픔 외로움 죄책감 후회 분노 두려움 걱정 고뇌 좌절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진다.
종종 아주 불편해지고 육체적인 통증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은 때로 가장 심한 육체적 고통과 맞먹는다.
우리가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건이나 갈등이 야기하는 바로 이 고통 때문이다.
삶은 끊임없이 문제를 연속적으로 배출하고 있으므로 삶은 항상 힘들고 기쁨과 동시에 고통으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삶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이 문제들이다.

벤저민 플랭클린의 말대로 고통을 느껴야 배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은 문제를 환영하며 실제로 문제가 주는 고통을 환영하는 법을 터득하려 한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당면한 문제를 두려워하면서 피하려든다.
문제를 질질 끌면서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문제를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심지어는 문제를 잊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약을 복용하여 결국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마비시킴으로써 고통을 안겨준 문제를 잊기도 한다.
우리는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주면에서 맴돌려고 한다.
문제 안에서 괴로워하기 보다는 문제 밖으로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문제와 이에 따르는 고통의 감정을 피하려는 이러한 성향이 정신병의 근본 원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든 작든 이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크든 작든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문제와 이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상당히 멀리 가버린다.
쉬운 길을 찾기 위해서 분명히 건전하고 지각 있는 모든 방법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안주할 수 있는 환상을 최대한의 공력을 들여 만들어낸다.
때로 이러한 현상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 되기도 한다.
칼 융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표현대로 라면 신경증 즉 노이로제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피하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 피하려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 진다.
신경증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과 문제를 피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신경증은 더욱 더 쌓인다.
그런데 다행히 어떤 이들은 신경증에 대겨할 용기를 지니고 있어서 대체로 정신분석가의 도움을 받아서 정당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나간다.
어떤 경우든지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정당한 고통을 피하려 하면 역시 문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장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만성적인 정신병 상태에서 더 이상 성숙하지 못하고 정체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치유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시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정신적,영적으로 건강해지는 법을 늘 가르치도록 하자.
고통을 겪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문제에 직면하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는 뜻이다.
이미 나는 훈육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라고 말했다.
이것이 괴로움을 견디게 해주는 테크닉이고 문제가 주는 고통을 겪으면서 끝까지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다.
그 과정 중에 우리는 배우고 성장한다.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훈육 시킨다는 것은 괴로워하는 법과 동시에 성장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의미다.
훈육은 괴로움을 감당하게 하며 문제로 인한 고통을 건설적으로 겪게 한다.
그렇다면 훈육이라는 이 도구는 과연 무엇인가.
훈육에는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책임을 지는 것,진리에 대한 헌신,균형잡기,이렇게 4가지가 있다.
이것은 복잡한 도구가 아니라서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주 단순해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열 살이 될 때쯤에는 사용법에 능숙해 진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왕과 같은 힘 있는 사람들이 종종 이 단순한 사용법을 잊어버려 삶을 망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 도구의 복잡함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이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각각의 도구들을 분석해 보고 그것을 사용하려는 의지 즉 사랑이라는 것을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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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통해 삶의 고통,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나는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대처를 했는가? 라고 반문해 보고 나의 대처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스캇펙의 글처럼 나 또한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회피했던 순간들이 대부분 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고통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삶은 평탄해야 하고 힘들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정반대로 고통이 동반된 삶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면서 살아내는 능력이 진짜 삶인 것 같다.
이 글을 보면서 독자들도 자신의 삶의 문제와 고통을 지혜롭게 해쳐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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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캇 펙] “어떻게 내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일 수 있을까? 라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눈물이 흘러 내릴 때

눈물이 흘러 내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사역 중에 가장 위대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보다 많은 시간을 책을 읽는 데에 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데 보냈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는 실제 생활 가운데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를, 진주를 찾는 상인을, 들판에서 경작하는 소작인 농부를, 길가에 자라나고 있는 백합화를, 땅에 떨어지는 참새를 보고서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셨다.

나는 몇가지 할 일이 있어서 마이애미에 간 적이 있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휴가를 얻어 즐기기 위하여 거기에 와 있었다. 어는 휘영청 달밝은 밤 거리를 걸어 내려가다가 어떤 큼지막한 건물 앞을 막 지나려 하는데 한 여자 사원이 혼자서 전보쪽지를 손에 쥐고서 구슬피 울고 있었다. 달빛은 땅위를 더 없이 밝게 비추고 미풍은 간간이 불어오는데 그녀의 슬퍼하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시 걸어나갔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육신의 병이 있다면 의사한테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지 않을까? 만약 그녀가 나를 보고서 내가 누군지를 알았다면 “선생님은 목사님이시지요?나는 지금 슬픔에 복받쳐 울고 있어요. 내 눈에 눈물 좀 씻어주셔요”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내가 신문,라디오,T.V.방송을 통해서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수많은 편지가 날아오며 전화통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때마다 전파자는 무릎을 끓고 자기의 지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다.

마이애미에 있던 그 여인이 나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고통이란 죄의 결과이지요.선생님은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벌을 주고 계십니다. 무릎을 끓으시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리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하나님의 용서가 임함으로 고통이 물러가고 마음의 노래가 되살아 나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은 정답이 못된다.

나는 또한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선생님의 고통은 오직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린다면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해변을 거닐며 달을 바라보셔요. 잔잔히 흐르는 파도 소리를 들어 보셔요.” 때로는 그게 정답이다. 우리는 어떤 조그마한 문제를 갖고 너무 깊이 상심한 나머지 사실보다 더 악화되는 경우를 종종 바라 본다. 그러나 이러한 처방도 언제나 정답은 될 수 없다. 고통은 보다 리얼하다. 누군가가 몇 줄의 시를 남겨 놓았다.
“고통이 사실이 아니라 하지만 바늘을 세우고 그 위에 앉아보렴. 그것이 네 살을 찔러서 피를 낼 때 아파서 싫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통이란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이지요.당신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어린 소녀가 길가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다. 꼬마는 엄마에게 ” 이 세상이 온통 방석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방석이 아니기에 이따금씩 넘어져서 다친다.

나는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리라.”고난이란 선생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찬 바람 북풍이 자작나무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게 하는 것처럼 선생님께 당하는 고난은 영혼에 활력을 주며 인생을 보다 성숙케 합니다.”
그녀가 나에게 상담했다면 나는 아프리카 원시족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믿기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선과 행복을 주려고 하지만 하나님에게 좀 모자란 친구가 있어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마귀가 있어 많은 고통을 인간에게 준다고 믿지만 그것 역시 정답은 못된다.
그러면 정답은 무엇인가?
그 여인이 나에게, 처음부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먼저 밖에 나가 실컷울어버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슬퍼해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울 수 있는 동물로 만드셨으며, 눈물은 정상적인 인간의 일부분이다. 인간 내부에서 슬픔을 억제하는 일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는 그 여인에게 울음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아니므로 그만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 여인이 흘리는 눈물의 원인을 알고 싶다. 아마도 그녀는 외로왔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으나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 못이겨 슬퍼한다. 아마도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휴가 때를 위하여 1년 내내 저축한 돈을 갖고 왔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는 매우 사랑했던 누군가가 죽었음을 알리는 전보를 이제 막 받고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결혼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는 장래 아무 소망도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건간에 나는 그녀에게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녀를 도와주고 싶을 따름이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은 없다. 모든 문제에 해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여 줄 수 있다. 유명한 전령이었던 어니 파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해변에서 생겨났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주었다. 전투에서 죽어 넘어진 소년들의 소지품들이 모래에 흩날리고 혹은 파묻혀 있었다. 사진이랑,편지랑 책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한 소년 옆에 키타가 놓여 있었고 또 한 소년 옆에 반쯤 모래에 파묻힌 성경이 한권 보였다. 어니 파일은 그것을 주워들고 길을 재촉한다. 반 마일 쯤 왔을 때 그는 다시 돌아와 그가 성경을 처음 발견했던 그 장소에 와 소년 옆에 그것을 놓았다.

나중에 그가 말하였다. “내가 왜 이 책을 집어들었는지 또 내가 왜 되돌아 갔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그는 성경을 그 소년의 보모에게 보내어서 그들이 위로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되돌아갔던 것은 그 소년이 성경을 갖고 있다가 죽었기에 성경책은 영원히 소년과 함께 있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이러한 체험은 이 사람이 성경을 인간생명의 해답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이 여인에게 나는 성경을 읽어 주었으리라.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계21:4) 그렇지 않으면 이 성경을 읽어 주었으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그러나 나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이 여인에게 시편 28:7을 읽어 주었을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무한하신 인격적 존재자가 계시고,그리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고,능력으로 세계를 붙드시고, 그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아시는 분이심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난다 해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시다.

어느날 나는 켄퍼노키 늪지대 위를 비행하였다. 저지대로 내려오니까 물 위에 푸르스름한 보기 추한 더껑이가 보였다. 거기에는 더럽고 불결해서 인체를 해치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한 때 그 늪지대의 물은 높은 산에서 흘러 나오는 깨끗하고 맑은 물이었다. 그러나 저지대에서 흐르는 것을 멈추기 때문에 부패하고 만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당신이 저지대에 살면서 멈추면 생애도 부패하기 시작한다. 때때로 당신의 눈물이 눈을 흐르게 함으로 앞길을 바라볼 수 없게 할 때에도 전진은 계속해야 한다. 의사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여러가지 목적을 위해서 두뇌의 여러 부분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람이 걱정하거나 상심할 때면 윗 부분의 두뇌 세포를 사용한다. 두려움도 마찬가지, 윗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아랫부분 두뇌 세포는 육체의 근육활동을 작동시킨다. 활동을 하고 있을 때면 일상생활에서 쌓인 긴장이 윗 부분 두뇌 세포에서 풀어지며 이들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다하게 한다.

뉴 잉글랜드에서 한 사람이 마음에 큰 슬픔과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로 와서 “밖에 나가 꿀벌에게 고통을 말해 보셔요”라고 말했다. 저것은 참으로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벌처럼 부지런하라”고 한다.
사람이 쉬지 않고 일하는 꿀벌을 바라보노라면 아래쪽 두뇌 세포가 작동하는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상심케 하는 긴장도 풀어진다. 당신이 상심하여 눈물을 흘릴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침대로 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맘속에 하나님이 계셔 그의 믿음을 활용하면 그 능력이 당신에게 흘러 넘쳐 현실 가운데 역사한다. 이렇게 계속해 나가노라면 마음 속에 고통도 이길 수 있게 된다.
시편 기자는 ” 내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니… 내가 노래하여 그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했다. 최근에 유행되는 대중가요 “빗속을 거닐면서”라는 노래가 있다. 수년 전에 유행되었던 대중가요 중에 “빗속에서 노래하며”라는 게 있다. 이들 두 노래는 장단이 맞는다. 당신 앞길에 비가 내리고 모든 것이 어둡고 침울해도 걷기를 계속하며 멈추지 말라. 걸을 때 노래가 나온다.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을 가짐으로써 빗속에서도 노래부를 수 있으리라.
“내 마음이 심히도 기뻐하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상심이 비통과 분개와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면 그러한 때 인간은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늪과 같이 되어 버린다. 그러한 때 얼굴을 찌푸리고 싶고, 불평하고 싶은 곳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마음 속에 생겨나는 노래가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

고통을 넘어 승리하는 삶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고” (시편 107:6)

시편 107편 기자는 4번이나 극심한 고통 가운데 처했었다. 그는 그때마다 고통 가운데서 주께 부르짖었으며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셨다.

“여화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구원 받은 자들이여 여호와를 찬양하는 이 말들을 계속할지니라. 그는 모든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셨으며 이방나라들에서 동과 서에서,남과 북에서 부르셨는니라.
어떤 사람은 길 없는 사막 가운데서 방황하였으며 도시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춥고 배고팠으며 목말랐고 살 소망을 포기해 버렸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셨도다.

그는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인도하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심이로다.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려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셨도다.

흑암과 사마의 그늘에 인도하여 내시고 그 엮은 줄을 끊으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미련한 자는 저의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고난을 당하매 저희 혼이 각종 식물을 싫어하여 사망의 문에 가깝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셨도다.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험에서 건지시는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감사제를 드리며 노래하여 그 행사를 선포할지로다.
배를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서 부르짖으니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백성의 회에서 저를 높이며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지혜있는자들은 이 일에 주의하고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달으리로다. (시107:1~32,43)

고난이란 인간들이 매우 잘쓰는 용어이다 우리 인간은 거의 매일 어떤 형태의 고난에 직면한다. 재정적인 어려움,가정의 어려움,건강상의 어려움,교통사고의 어려움,인간관계의 어려움 등 수없이 많다. 선지자 사무엘은 백성들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뻫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삼상8:6). 사무엘은 고난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았다. 그는 기도함으로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베드로는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하였다.”너희 염려를 모두 주께 맡겨라,그리하면 그가 너희를 권고하시리라.”(벤전5:7) 여기에서 ‘모두’란 말에 유의하라.해야 할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뜻이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리라.”(시37:5) 이것은 마치 업무처리를 할 때 넘겨버리는 것과 같으며 기도로 말미암아 이루게 하는 것이다.

놀라운 부분은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고통에서 구원해주신다는 것이다. 기도란 감정적으로 해당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실재적이고 현재적인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저가 땅의 전쟁을 쉬게 하심이며 … 활을 꺽고 창을 끊으면 수레를 불사르시는 도다. “(시 46:1-9) 기도는 현실적인 고통에서 현재적인 구원을 받게 한다 고통 가운데서의 응답은 기도이다.
나는 금주에 당장 필요한 돈 500달러가 없어서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했다. 이것이 매우 긴요한 것이어서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나는 아침 8시 30분,가정예배시에 이것을 하나님께 구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이 곤궁에서 3시간 만에 해결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마음으로 찬양을 올렸다! 그는 항상 그렇게 빨리 응답하지만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 다 맡겨버리고 그를 확실히 믿기만 하면, 바라는 바 효과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따금씩 우리 자신이 문제를 만들어 따지고 싶은 충동을 받는다.
‘내 잘못으로 오늘날 이 곤경에 빠졌으니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할 자격이 있겠는가?’
이것은 사탄의 계략으로서 우리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무지나 어리석음,심지어는 하나님께 대한 반항일 수도 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맡기고 부르짖기만 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곤경에서 구원하시기에 능력이 매우 많으시다.
요나가 큰 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경우를 상상해 보라. 이 문제의 원인은 그의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원하시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큰 고기에게 말씀하셨으며 그 고기는 요나를 해변에 토해 놓았다.
만약 당신이 고통 가운데 처해 있다면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구하라.그러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을 위해 역사사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