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꽃

눈 꽃

겨울에만 피고 열매는 맺을 수 없는 꽃
순결한 마음을 가졌는지 하얀색만 고집하는 꽃
무엇이 그리 급한지 잎도 없는 나무에 꽃을 피우네

눈 꽃

내 마음에 간직한 희망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도 수줍어 보여줄 수 없는 꽃
열매를 맺으면 내어드리고 싶은 마음의 꽃

하얀 백발 노인의 머리에 피는 꽃
인생의 흔적이 꽃으로 피었네
나도 꽃을 피우기 위해 백발이 되어 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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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눈이 많이 내렸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나무에 내린 눈을 보며 시인은 아니지만 시 한 수 적어보고 싶어 글 적 거려본다.





아파트 화재 피난행동요령

아파트 화재 피난행동요령

저희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아파트에 화재가 났을 시 피난행동요령이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네요
읽어 보시고 잘 대피해서 인명 피해가 없도록 해야 되겠네요.

🏢자기집 화재 시 대피가 가능한 경우

✔️화재 사실을 집에 있는 사람에게 알린다.
✔️계단을 이용해 낮은 자세로 지상층,옥상 등 안전한 장소로 대피한다.
✔️대피 시 출입문은 반드시 닫고,엘리베이터를 타지 않는다.
✔️비상벨을 누르고 119에 신고한다.



🏢자기집 화재 시 현관 입구 등의 화재로 대피가 어려운 경우



✔️화재 사실을 집에 있는 사람에게 알린다.
✔️대피공간,경량칸막이,하향식 피난구등이 설치된 곳으로 이동하여 대피한다.
✔️대피공간 등이 없는 경우 화염,연기로 부터 멀리 이동해 문을 닫고,젖은 수건등으로 틈새를 막는다.
✔️119로 현재 위치, 상황을 알리고 구조 요청한다.

🏢다른 곳 화재시 자기 집으로 화염,연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



✔️화재 사실을 집에 있는 사람에게 알린다.
✔️세대 내에서 대기하며 화재 상황을 주시한다.
✔️연기가 들어오지 못하게 창문을 닫는다.
✔️119로 신고하고 안내방송에 따라 행동한다.


🏢다른 곳 화재 시 자기 집으로 화염,연기가 들어오는 경우


✔️화재 사실을 집에 있는 사람에게 알린다.
✔️복도,계단에 화염,연기가 없이 대피 가능한 경우 1.대피 요령에 따라 행동한다.
✔️복도,계단에 화염,연기가 있어 대피가 어려운 경우 2.구조요청 요령에 따라 행동한다.

*다른곳 :아파트의 다른 세대,복도,계단실,E/V홀,주차장등

이상 아파트 화재 피난행동요령 이었습니다.

고통의 삶을 벗어나는 방법

어차피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이다.

삶은 고해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진리 중의 하나다.
이것이 위대한 진리인 까닭은 진정으로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것을 뛰어 넘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삶이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즉 진정으로 그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삶은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된다.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삶이 힘들다는 사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힘들다는 이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대신에 드러내 놓고 또는 은근히 자신이 지닌 어려움 걱정 문제가 엄청나다고 끊임없이 불평한다.
그들은 마치 삶은 기본적으로 편안한 것처럼 다시 말해 삶은 응당 편안해야 된다고 여기는 것 같다.
자신이 겪는 어려움이 특별히 자신이나 가족 부족,계급,국가,인종 혹은 인간에게만 들이닥친 유례 없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내놓고 또는 은근히 발설한다.
나 자신도 그래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평이 어떤 것인지 안다.

삶은 문제의 연속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저 불평하고 싶은 걸까
우리 아이들에게 이 문제들의 해결 법을 가르치고 싶은 걸까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는 훈육이다.
훈육 없이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부분적인 훈육으로는 일부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
온전한 훈육이 있어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말한다.
문제가 생기면 어떤 문제냐에 따라 절망 비애 슬픔 외로움 죄책감 후회 분노 두려움 걱정 고뇌 좌절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감정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불편해진다.
종종 아주 불편해지고 육체적인 통증과 같은 고통을 느끼며 그 고통은 때로 가장 심한 육체적 고통과 맞먹는다.
우리가 문제를 문제라고 부르는 이유는 사건이나 갈등이 야기하는 바로 이 고통 때문이다.
삶은 끊임없이 문제를 연속적으로 배출하고 있으므로 삶은 항상 힘들고 기쁨과 동시에 고통으로 가득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이 모든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
삶의 승패를 가르는 것이 이 문제들이다.

벤저민 플랭클린의 말대로 고통을 느껴야 배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명한 사람들은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은 문제를 환영하며 실제로 문제가 주는 고통을 환영하는 법을 터득하려 한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게 현명하지 못하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우리들 거의 대부분은 당면한 문제를 두려워하면서 피하려든다.
문제를 질질 끌면서 문제가 저절로 사라지기를 바란다.
문제를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심지어는 문제를 잊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약을 복용하여 결국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마비시킴으로써 고통을 안겨준 문제를 잊기도 한다.
우리는 문제와 정면으로 부딪치기보다는 주면에서 맴돌려고 한다.
문제 안에서 괴로워하기 보다는 문제 밖으로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문제와 이에 따르는 고통의 감정을 피하려는 이러한 성향이 정신병의 근본 원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든 작든 이러한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크든 작든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다.
정신적으로 완전히 건강한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문제와 이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상당히 멀리 가버린다.
쉬운 길을 찾기 위해서 분명히 건전하고 지각 있는 모든 방법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안주할 수 있는 환상을 최대한의 공력을 들여 만들어낸다.
때로 이러한 현상은 현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 되기도 한다.
칼 융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표현대로 라면 신경증 즉 노이로제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피하려고 했던 그 고통보다 피하려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워 진다.
신경증 자체가 가장 큰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통과 문제를 피하려고 시도하는 동안 신경증은 더욱 더 쌓인다.
그런데 다행히 어떤 이들은 신경증에 대겨할 용기를 지니고 있어서 대체로 정신분석가의 도움을 받아서 정당한 고통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나간다.
어떤 경우든지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정당한 고통을 피하려 하면 역시 문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성장을 놓치게 된다.
우리는 만성적인 정신병 상태에서 더 이상 성숙하지 못하고 정체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치유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은 시들어간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과 자녀들에게 정신적,영적으로 건강해지는 법을 늘 가르치도록 하자.
고통을 겪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문제에 직면하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겪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자는 뜻이다.
이미 나는 훈육이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필요한 기본적인 도구라고 말했다.
이것이 괴로움을 견디게 해주는 테크닉이고 문제가 주는 고통을 겪으면서 끝까지 성공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다.
그 과정 중에 우리는 배우고 성장한다.
우리 자신과 자녀들을 훈육 시킨다는 것은 괴로워하는 법과 동시에 성장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의미다.
훈육은 괴로움을 감당하게 하며 문제로 인한 고통을 건설적으로 겪게 한다.
그렇다면 훈육이라는 이 도구는 과연 무엇인가.
훈육에는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책임을 지는 것,진리에 대한 헌신,균형잡기,이렇게 4가지가 있다.
이것은 복잡한 도구가 아니라서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주 단순해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열 살이 될 때쯤에는 사용법에 능숙해 진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왕과 같은 힘 있는 사람들이 종종 이 단순한 사용법을 잊어버려 삶을 망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 도구의 복잡함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이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각각의 도구들을 분석해 보고 그것을 사용하려는 의지 즉 사랑이라는 것을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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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을 통해 삶의 고통,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을 가졌다.
나는 삶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어떤 방법으로 대처를 했는가? 라고 반문해 보고 나의 대처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스캇펙의 글처럼 나 또한 그것을 잊어버리기 위해 회피했던 순간들이 대부분 이었던 것 같다.
어차피 고통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힌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삶은 평탄해야 하고 힘들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사는 삶이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정반대로 고통이 동반된 삶을 어떻게 지혜롭게 해결해 나가면서 살아내는 능력이 진짜 삶인 것 같다.
이 글을 보면서 독자들도 자신의 삶의 문제와 고통을 지혜롭게 해쳐 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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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스캇 펙] “어떻게 내 삶은 문제와 고통의 연속일 수 있을까? 라며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의 비법

성공하려거든 절차를 밟아라

1993년 가을,애플 뉴튼(Apple Newton)은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신제품 출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첫 번째 단계로 선택한 언론 홍보 활동은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언론이 수십 차례 보도해준 덕분에 애플 뉴튼은 초기부터 언론 홍보 효과를 톡톡히 봤다.
어느 누구도 애플 뉴튼의 신상품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리란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치 공중 폭발되기 전까지는 엄청난 기대속에 떠들썩하게 진행됐던 챌린저호의 운명저럼 그 제품에서 사소하지만 제품 특성상 치명적일 수 있는 기술적 결함이 발견되었다.
홍보의 핵심 사항이었던 필기 인식 (handwriting recognition) 시스템이 실제로 잘 작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애플 뉴튼의 경영진이 제품 출시 전에 사업 타당성 도출을 위한 제품 품평회 및 시연회를 열었더라면, 이처럼 회사 이미지에 치명적인 불행한 사건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필기 인식 시스템이 아직 시장에 선보이기에는 이르다고 충고했을지도 모른다. 즉 ,회사가 신제품에 대한 타인의 평가기간을 나름대로 가졌다면 공개적인 망신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성공하려거는 이런 절차를 밟으세요


사업 구상 안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일단 주변 친구,이웃들에게 서비스나 제품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위험 요소를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개인이나 회사나 일을 함에 있어 절차를 밟는 것이 정말 중요한 요소인 것 같다.
사업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꼼꼼하게 따져보고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 있다.
나 또한 사업 초기에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먼저 특허,실용신안,디자인,상표를 먼저 내고 그리고 제품을 개발하곤 했는데 실제로 제품을 개발하다 보면 나의 생각과는 많이 다른 부분들을 보곤 한다.
그때는 당혹스럽다라는 표현보다 더 당혹스럽다. 특허나 여러가지 비용을 지불하였기에 그 보다 더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다시 출원해야 되는 문제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나 뿐만이 아니라 개인 개발자는 그런 오류를 범하기 쉬운 것 같다.
그래서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도 아웃 풋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 사업 구상 안에 대한 충고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변 친구에게 일단 물어보라. 이웃들에게 제품에 대해 소개해 본다.
이것 정말 기초 중에 기초인데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한 예로 칼국수를 쉽게 집을 수 있는 국자를 만들었는데 그럴 듯 해 보이긴 했다.
그래서 내가 팔아볼 목적으로 직접 칼국수 집에 가서 시연을 해 보았는데 보기보다 성능이나 디자인 위생성등 기대한 것 이하였다. 그래서 직접 식당 주인한테도 사용해 볼 것을 의뢰해 보았다.
내가 팔고 싶었지만 직접 사용해 보니 팔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직접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왔다.
그리고 그 개발자를 만나 이 제품을 실제 시연해 보았는지 주위 사람한테 주고 사용해 보았는지 물었는데 그 분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개발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관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앞으로 좀 더 꼼꼼히 세밀하게 조사하여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지 마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글을 올린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간결한 사업계획서 – 엘턴 셔원지음 이코북의 내용을 인용하여 나의 생각을 적어 보았다.

대장내시경 약 먹은 후 배변시간

대장내시경

50대가 되면 대장내시경을 정기적으로 해야되지 않을까 생각이된다.
대장에 용종이 발견될 수도 있고 이것이 대장암으로 커질 수도 있어 미리 예방차원에서 대장내시경을 하면 좋을 것 같다.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말이 있듯이

난 몇년 전에 대장내시경을 하였는데 그때 용종을 3개를 제거하였다.
이번에도 대장내시경을 해야 한다. 이유는 배변 검사에서 약간의 혈흔이 발생하여 국가에서 검사를 무료로 해 준다고 해서 하게되었다. 근데 걱정이 안되는 것은 치질일 거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예상되어 하게되었다.

먼저 전화로 예약을 하고 일주일 전에 병원에 들러서 필요한 서류와 약을 받아왔다.

* 대장내시경 검사 전 주의 사항 *

👩‍🍳 검사 5일 전

🍽️피해야 할 음식들 (잡곡류,김치,건더기 많은 음식,질긴 음식,씨있는 음식과 과일들)은 먹지 말것
=> 장 청소과 깨끗하게 되지 않고 음식물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 검사 1일 전

🍽️ 부드러운 음식으로 오후 4시 까지만 식사하시고 그 이후 시간에는 생수물만 드세요
=> 정해진 시간 이후로 식사하게 되면 장 청소가 깨끗하게 되지 않습니다.

💊 중단하셔야 할 약 (드시는 분만)

혈액순환제,혈전용해제,아스피린 계열 약 5일전 부터 끊으세요. 타병원에서 처방받으시는 분은 병원에 미리 연락 꼭 해보시고 중단여부 확인하세요.
=> 용종절제술을 할 경우 지혈이 되지 않아 문제 발생할 수 있습니다.

* 쿨프렙 먹는 법 *

<검사 전날>

1.물통에 쿨크랩 1봉지 + 물 표시선(500ml)까지 채워서 저녁6시 ~ 6시 30분까지 드세요.
2.물통에 쿨크랩 1봉이 + 물 표시선(500ml)까지 채워서 저녁6시 30분 ~ 7시까지 한번 더 드세요
3.빈 물통에 생수 물 표시선(500ml) 까지 채워서 주무시기전까지 2통 이상 충분히 드세요.

<검사 당일>

💊 혈압약만 새벽5시에 드세요 (드시는 분만)

1.물통에 쿨크랩 1봉지 + 물 표시선(500ml)까지 채워서 새벽 5시 ~ 5시 30분까지 드세요.
2.물통에 쿨크랩 1봉이 + 물 표시선(500ml)까지 채워서 새벽 5시 30분 ~ 6시까지 한번 더 드세요
3.약 다 드신 후 바로 가소콜 2봉지를 짜드세요.
4.빈 물통에 생수 물 표시선(500ml)까지 채워서 7시까지 2통 드세요.

💚 마지막까지 보신 변은 노란 물처럼 나와야 합니다.
=10번 이상은 보셔야 깨끗하게 나옵니다.

위의 내용은 대장내시경 검사전 주의사항과 쿨크랩 먹는 법을 설명하였다.

위의 방법대로 숙지하면서 대장내시경 5일전 부터 식단을 조절해야 되는데 식단을 조절할 시 먹을 음식이 별로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먹는 것 먹고 2일 전부터 조절에 들어갔다.

이제 쿨크랩을 먹어야 되는 날이 왔다.
내장내시경을 함에 있어 누구나 겪어야 되는 장을 비우는 것이 제일 힘든 일임을 알 것이다.
나도 내장내시경을 여러번 해봤지만 약 먹는 것이 정말로 힘든 일임을 새삼느끼게 한다.

먼저 쿨크랩먹는 순서대로 저녁에 1시간안에 2통을 먹고 생수도 1시간동안 생수를 2통을 마셨다.
배가 너무 불러 너무 거북하고 힘들다.

이제 여기서 중요한 것이 남아있다. 언제 배변이 나오냐는 것이다.
다들 배변나오는 시간이 궁금해 할 것 같다.

🕟대장내시경 약 복용 후 배변 나오는 시간

다들 궁금해 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아 나도 이 시간을 측정해 보기로 했다.
난 6시 부터 약을 먹고 7시 30분까지 물 2통을 비웠다.
그리고 배변 나올 때를 기다렸다. 근데 8시가 되어서도 조짐이 없다.
정확히 난 8시 40분이 되어서 배에 신호가 왔다.
처음에는 숙변같은 것이 나왔고 그 때 부터 10분 단위로 계속 화장실을 들락 거렸다.
한 10번은 더 간 것 갔기도 하다. 화장실에 계속 앉아 있어야만 했다.
거의 10시 까지는 계속 들락 거렸던 것 같다.
똥꼬가 허는 것 같다.

📢 약 먹는 시간 1시간 30분
📢
배에 신호가 오고 설사가 나오는 처음 시간 1시간 10분 부터 ~

이 건 저의 경우이고 사람마다 시간은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도 남이 얼마나 걸려서 설사가 나오는지 알면 그 시간은 참고는 되겠죠.

아침에도 5시에 일어나서 혈압약 먼저 복용하고 동일하게 쿨크랩을 복용하고 생수를 2통 마셨다.
동일하게 화장실에 들락날락 그래도 전날 보다는 많이 가진 않은 것 같다.
거의 9시까지는 화장실에 간 것 같다.
그래도 잔변이 남아있는 느낌이 있지만 배변 물은 노랑색을 띄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깨끗하게 비워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내과에 10시쯤 도착하여 예약을 확인하고
대장내시경시 주의사항과 서류에 서명을 하고
속옷을 모두 탈의하고 뒤가 튀어져 있는 옷으로 갈아 입었다.
혈압을 측정하였는데 110,71정도이다. 당연히 먹은 것 없고 속은 다 비웠고 혈압약 먹었으니 정상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간호원이 한 번 더 화장실에서 속을 한 번 더 비워올 것을 주문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개운하지는 않았는데 한 번 더 화장실을 다녀오니 좀 나아졌다.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이름을 호명하여 침대에 누웠다.
왼쪽 팔에 닝겔을 맞았고 대기하고
대장내시경 실로 들어갔다.
자세를 어떻게 해야 되는 지 알려 주었고
조금 있다 안정제와 수면마취제를 놓아준다고 하는데 수면 마취제를 넣고 깨어나니 침대에 누워있었다.

항상 하는 수면내시경이지만 너무 개운하다.
예전에는 수면내시경을 하지 않고 검사를 해 봤는데 너무 괴로워서 고생했다.
비용은 좀 들지만 수면내시경을 하실 것을 권장드립니다.

옷을 챙겨 입고 의사를 만나야 되서 대기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불러서 의사를 만났는데 장이 깨끗해서 아무 문제가 없고 저번에 혈변은 아마도 치질일 확율이 높았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확인을 하였기에 안심이 되었다.

대장내시경은 2년,4년에 한 번 정도 하면 좋을 것 같다.
약 먹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내 건강을 살피고 돌본다는 것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기본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대장내시경을 하는 과정과 배변시간을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으로 보여져서 나의 경험담을 담아보았다.

아무쪼록 모두들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합니다.

모두다 화이팅 😀😀😀😀😀😀😀😀😀😀😀😀😀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시는가?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나는 내 신문 컬럼에서 이렇게 질문을 했지만 그에 대한 회답의 수가 얼마나 될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회답들을 다 읽는데 약 일주일이나 걸렸다. 내게 온 많은 편지들을 읽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편애하시는 분이 아니시다’라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어떤 회답은 저명한 사업가들의 명함이 인쇄된 용지로, 어떤 것들은 뜯어쓰는 값싼 편지지에 연필로 쓰여져서 왔다. 어떤 편지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들에게서 왔고, 또 어떤 것들은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왔다. 어떤 편지에는 하나님과 동행한 거룩한 삶을 살아온 것이 엿보이고, 어떤 것들은 그들이 얼마나 죄를 지었으며 얼마나 자신의 생을 부끄러워 하고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기도하게 될 때 우리 모두는 같은 위치에 서게 되며,각각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된다. 배운 사람이나 못배운 사람, 부자나 가난한 자, 성자와 죄인, 이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로써 하나님께 간구하면 그는 응답하신다. 예수께서 “누구든지 구하는 자는 받을 것이요”(마7:8)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가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는 또한 내게 매우 진지하게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과소평가 하면서 소위 응답이란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며 기도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기도하면 분명히 변화를 받는다고 믿고 있다. 기도하고 응답 받은 사람들과 논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경우에,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그가 뭘 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심으로써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

“나는 일본 진제이가쿠인의 나가사키 학교를 위해 무언가 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교사와 학생들이 원자폭탄으로 죽었지만 그들을 위하여 줄 돈이 내게는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내가 할 수 있는 무엇인지 보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며칠 후 [기독감리회지]에서 이 학교를 위해 [National Geographic Magazine]의 발행본들을 요청하는 난을 보았습니다. 나의 부친께서는 수년간 이 잡지를 구독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낡은 발행본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주 기꺼이 그것들을 보냈습니다. 그것은 내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교장인 타네오지바님은 그 잡지들에 대해 매우 감사해 하셨습니다.”

82세의 한 귀부인은 어떤 수술이 끝난 후, 자기가 다시는 걷지 못한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이렇게 썼다.
“다음날 아침, 나는 간호원에게, ‘나는 일어서겠다. 만일 내가 쓰러질지라도 주께서 나를 잡아주실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간호원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비키라고 하고 걸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5년 동안 나는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것을 들으니 나는 주께서 어떤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일어나 네 침상을 들고 걸어가라”(요5:8) 그 부인의 신앙과 정신을 가진다면 수많은 사람들도 갖가지 방법으로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기도야말로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 주었다고 생각했다.

기도 응답의 예에 대한 내 요청에 의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종종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여러 회신들이 왔다. 한 편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었다.
“당신은 성서의 엘리와 사무엘 이야기를 알고 계실 겁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아이에게 그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면 내게도 말씀하실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우린 마이애미에서 살려고 그리고 갔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파트를 사는데 자기와 같이 투자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나는 그것을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의 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남동생은 그것을 수지맞는 일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 후 어떻게 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거기앉아 기도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왜 망설이는지 알고자 했고 이유를 알자 좋은 제안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지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그 일에 돈을 투자한 사람들은 몽땅 잃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그 얘기가 거의 우습게 들릴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기 전에는 결코 일을 추진하지 않는, 몇몇의 성공한 사업가들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

기도 응답에 대해 내가 받은 편지들 중엔 병과 치유에 관계된 것이 많다. 이것은 내가 확실히 믿는 어떤 것이다. 나는 하루도 빼지 않고 어떤 아픈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내가 받아온 응답들을 나열하면 책 한 권은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런 일들에 대해 써 보낸 많은 편지들을 보고서 나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


어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몇 주 전 심한 심장마비를 앓고 병원에 있다가 집으로 막 돌아왔습니다. 문병객들을 받아도 좋을 만큼 내 상태가 좋아졌을 때, 아홉살 난 내 어린 손녀가 제 부모랑 같이 날 보러 왔답니다. 그들이 돌아가려 할 때 손녀가 되돌아 내 침대 곁으로 오더니 하는 말이,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어떻게 나으신 줄 아셔요?’ ‘모르겠는 걸, 왜지? 그러자 그애는 ‘그건 할아버지 나으시라고 내가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이어요’라고 말하더군요”
당신은 아홉살 난 어린 여자 아이의 기도가 어떤 변화를 일으켰다고 믿는가?


또다른 편지는 곧 치룰 수술을 무척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썼다.
“나는 하나님께서 수술칼을 인도하시고 또 그 칼을 쥔 사람의 마음을 인도하시며,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내 곁에 가까이 계셔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책임져 주시길 구했고, 결과가 무엇이든 거기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기고서 말했습니다. ‘주여,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가 사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저는 살 것이며, 죽는 게 당신 뜻이라면 저는 죽겠습니다.’ 바로 그 때, 그 순간, 내 마음의 무거움과 무서운 공포, 그 모든 짐이 내게서 옮기워졌습니다. 그리고 즉시 나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가 거기 계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는 내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그 사람 마음 속에 찾아온 평화와 안정이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주 가능한 일이다. 그 경우 하나님은 의사를 통해 역사하셨지만 그 의사는 환자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기도에 대한 응답들을 살펴보면 흥미롭다. 나는 특히 이 예를 좋아한다.

“내 아들은 자동차 사고에서 즉사해서 그의 젊은 아내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찌나 가슴아파하는지 곧 완전히 쓰러져버릴 것 같았습니다. 우린 모두 그녀를 위로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제발 내 아들 대신 그녀 마음 속에 들어서 줄 다른 남자를 보내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삶 속에 한 젊은 남자를 보내셨고 그녀의 비통함은 곧 행복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결혼해서 이제 어린 사내 아이를 가졌습니다. 그들은 아주 행복했고 그래서 그녀의 부모와 나도 행복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고 이 두 젊은이들이 만나게 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다.’라고 했는데, 이런 경우는 정말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은 어떻게 기도에 응답


다른 한 편지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내가 가장 열심히 기도하여 4년이나 걸려 응답을 받은 일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내겐 훌륭한 사내 아이가 있습니다. 그 애가 한 살 때 우린 아이를 하나 더 낳아 둘이 같이 자라게 하고 싶었습니다. 아기의 첫 번째 생일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린 곧 둘째 아이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달 후 그 아이를 잃었을 때 우리의 비통함과 실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실망을 생각해 보십시오.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첫 번째 실망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3년 동안 우리는 두 아기를 더 잃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는 동안 나는 계속 하나님께 아이를 하나 더 주시길 기도했습니다. 매일 밤, 나는 온갖 정성을 다하여 영으로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중 나는 내가 좀 이기적인게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점점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겐 아이가 하나 있는데 그만한 축복도 받지 못한 사람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당신 뜻이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나자 순식간에 절망감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을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계획에 따라 내 인생을 인도하시길 간구했습니다. 내 기도에 응답을 가져온 것은 아마도 내가 가장 바라던 그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였을 것입니다. 우리 아들의 다섯번째 생일이 두 주 지난 후에 예쁜 사내 아이가 태어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축복에 대해 매일밤 감사를 드린답니다.”
가끔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다리라.”
아마도 그 분은 우리가 그의 응답을 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그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전기에 대해 잘 모르는 것 만큼이나 기도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공기로부터 그 경이로운 힘인 전기를 끌어내는 발전기를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우리는 그 힘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필요한 무수한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전기를 만드셨다. 나는 우리집을 밝히는 전기를 만드신 하나님이 우리 삶을 밝히는 힘을 만드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리라고 믿는다. 우리의 버스를 움직이는 힘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이 살아가게 하는 힘 만드시는 것을 잊지 않으셨으리라고 믿는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기 위한 수단이다.
주여,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소서!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내용 발췌

병고침을 받기 위한 기도

성경은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강조한다.믿음의 기도로 말미암아 병고침과 건강을 얻으려면 네가지 기본적인 지침을 따라야 한다.

(1) 하나님은 병을 고칠 수 있고 또 고치시리라는 원천적인 믿음을 가져야 한다.
(2) 하나님은 의학과 신앙을 동일하게 사용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3) 치료를 하는 데 있어 죄된 행동이나 영적으로 방해가 되는 것들을 끊어 버려야 한다.
(4)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알고 받아 들여야 한다.

(1)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문제는 어떠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있느냐 혹은 하나님이 없느냐이다. 그에게 하나님이 계시면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과 육체 가운데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능력은 역사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문제는 믿느냐 아니면 믿지 않느냐이다. 우리는 한 아버지가 병든 아들을 데리로 예수께 나온 사실을 알고 있다.그가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자 주님은 “네가 믿으면”이라고 말씀하셨다.(막9:22~23) . 가정이란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도 인간의 상호관계성을 맺고 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믿느냐 혹은 안믿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사람들은 완전하게 믿는 것이 아니고 또한 완전하게 불신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신앙과 불신앙이 동시에 내재해 있다. 문제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 중에서 어는 것을 잡느냐에 있다. 당신이 만약 신앙을 강조함으로 믿음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성장한다. 그것은 당신이 통과해야 하는 첫 관문이다.

(2) 의사를 부르러 부르고, 병원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냄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하나님은 자연적인 법칙, 영적인 법칙 모두를 사용하여 일을 하신다. 의사는 인체 구조를 알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안다. 그는 또한 육체의 질병의 성질과 원인과 치유방법을 알고 있다.
물론 의사의 지식은 완전히 못하다. 그래서 그는 많이 배워야 한다. 여기에 의학 연구의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은 의사들을 만드셨고 의약품을 만드셨다. 다만 인간이 이들을 잘 배합함으로써 우리 치료에 대한 기도가 많이 응답받는다.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느냐는 그가 응답하시는 사실보다 중요치 않다.

그러나 치료에는 의학을 훨씬 뛰어 넘는 요인들이 있다. 나는 하나님께 병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가장 먼저 의사와 간호원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하나님의 치료하는 은혜를 받아서 잘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법칙이나 그들의 처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령한 법칙이 있다. 믿음을 사용함은 의학을 사용함과 같이 과학적이며 실제적이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키며 수많은 경우에 병든 자를 건강하게 하고 죽음과 불치의 병에 대해서 결정적인 능력을 나타낸다.

(3) 병 고침과 건강을 얻기 위해서 믿음을 사용하고자 할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고 약품의 사용과 믿음의 사용 사이의 관계를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을 가로막는 것들을 피해야 한다.
나는 헤롤드 설만에게 몇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는 나의 책 [하나님의 심령과학] 에 대해 칭찬하는 말들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성공에 이르는 열쇠] 라는 그의 책이 더 훌륭하다. 그는 인간이 어떻게 느끼느냐에 대해서 많이 다루었다. 훌륭한 예를 들었는데 그것은 주로 그의 체험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고정 직업을 얻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중요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교정보는 부서에 종사하였다. 수 개월을 열심히 일했으나 보람도 없이 해고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 아무 도움도 얻지 못하고 돈만 소비했다. 이 사실은 그에게 금전적인 어려움과 창피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의 목구멍에는 감염이 생겼다. 그는 가장 좋은 의약의 치료를 받아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그는 미움을 버리고 그에게 잘못한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용서해 주었다. 그도 또한 용서받았다. 그랬더니 그의 목구멍은 깨끗이 치료함을 받았다.

우리의 언어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라. 예를 들면 ‘명상과 치유’의 유사점을 조사해 보자.
당신이 이들을 좀 더 세밀히 조사해 본다면 하나님을 명상하면 인간 육체에 치료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완전함과 거룩함’을 생각해 보자. 사람이 완전히 건강하다면 완전히 죄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 둘은 상호관계성이 있다. 누군가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인간을 만드신 이가 이들을 완전케 하시되 영혼의 상태에 따라서 육체를 강건케 하셨다.”

(4) 모든 기도하는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그의 응답을 받아야 한다. 어찌하여 어떤 사람의 기도는 응답되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하는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기도가 믿음이 부족하여서이거나 어떻게 기도하는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효험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기도는 연구되어야 할 분야이다. 어떤 사람의 기도는 다른 사람의 기도보다 훨씬 역사하는 힘이 많다. 기도로 병이 치료되는 것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제각기 자기의 주어진 생명이 끝날 때가 온다. 그렇지 않다면 복된 불멸의 세계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질병이 아니라 건강이며, 병약함이 아니라 강건함이며,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사실을 믿을만한 여러가지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는 자녀들이 고통받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나아가 기도드릴 때,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사용하여 우리의 건강을 증진시킬 때, 우리의 잘못된 습성을 끊어 버리고 그의 깨끗하게 하심과 용서하심을 받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응답을 얻기 위하여 그의 지혜를 신뢰할 때, 놀라운 평화가 우리 안에 넘쳐날 것이다. 그 평화는 우리의 두려움과 우리의 공포를 제거시킨다. 시편 기자의 약속이 우리 안에 성취될 것이다 ”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시27:14)
내가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마당에서 잎사귀를 끌어 모으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나를 매우 슬프게 했다. 나는 이 가을이 지나면 잎사귀를 볼 수 없다.

나의 서재에는 삼면으로 창문들이 있으며 이 창문들 사이로 아틀란타의 페어뷰 거리를 한눈으로 정겹게 훑어 볼 수있다. 정녕 이 나무들은 더 이상 아름답지 못하리라. 이 울긋불긋한 가을 빛깔들은 내 영혼에 양식이 되어 왔다. 찰스 킹슬리는 이 장관을 “하나님의 솜씨”라고 불렀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서 바른 마음씨를 가졌다면 누구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배길 수 없으리라.

그러나 이제는 그 잎들도 아름다움을 잃었다. 잎들은 나무에게 “우리는 이 나무에 아무 소용이 없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나씩 하나씩 잎들은 땅에 떨어져 쓰레기가 된다. 저 남자는 잎들을 갈퀴로 끌어 모아서 태워 버리거나 아니면 쓰레기 치우는 자에게 줌으로 쓰레기장으로 옮기운다. 나무들에 잎은 하나도 없고 앙상한 가지만이 남아 있어 해골같아 보기 흉하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펴 나가노라니까 언젠가 하나님에 관해서 읽은 말들이 생각난다. 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천상의 쓰레기 모으는 자로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왠지 으시시하다.
그러나 작가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인생이란 하나님 없이는 순수하거나 깨끗케 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네 인생 아름다왔던 것들은 모두모두 죽어가고 그리하여 하나하나 우리곁을 떠난다. 우리의 좌절된 꿈이나 바래진 이상,때묻은 양심을 회복하기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미 쓰레기가 되었고 악취를 풍긴다.

헨리 슬로원 코핀 박사는 중국 내지 선교 사역 중에 원주민 목사 모임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다. “다른 이교 신앙에서 여러분을 돌이키게 한 기독교 신앙의 결정적인 요인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기적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종교에도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인가? 그것도 아니다. 그들의 선생님은 놀라운 사실들을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이 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목사님이 “그것은 제작들의 발을 씩기는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밖에 모든 사람들은 그것이 맞다고 했다. 수건과 대야를 들고서 허리를 구부리시는 하나님이시다. 더 더욱 놀랄만한 사실은 그가 우리 죄들 – 우리가 은밀히 짓는 죄들 – 을 쳐다 보시고서 씻어 버리고 한번만 그렇게 함으로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점이다.

나무들을 바라보며 있으면서 내 마음은 몇달 앞서 가고 있다. 지금은 저들이 앙상한 가지이나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올 것이다. 그때 모든 나무가지들은 새 생명으로 움틀 것이며 싹이 나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더 많은 잎사귀를 가질 것이다. 나무는 아름다움을 또 다시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아도 부끄러움을 조금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가지들을 자랑스럽게 하늘을 향해 쭉쭉 뻗고 꿋꿋이 높다랗게 서 있을 것이다.

그는 ‘천상의 쓰레기 치우는 자’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분이시다. (요10:10)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에 새로운 기회를 부여받는다. 분명코 우리는 나무들을 위해 행하시는 하나님, 그보다 조금도 못잖게 그의 자녀를 위해 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리라.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내용 발췌

눈물이 흘러 내릴 때

눈물이 흘러 내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사역 중에 가장 위대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보다 많은 시간을 책을 읽는 데에 보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데 보냈다는 점이다. 그의 설교는 실제 생활 가운데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를, 진주를 찾는 상인을, 들판에서 경작하는 소작인 농부를, 길가에 자라나고 있는 백합화를, 땅에 떨어지는 참새를 보고서 영원한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이 모든 것들을 사용하셨다.

나는 몇가지 할 일이 있어서 마이애미에 간 적이 있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휴가를 얻어 즐기기 위하여 거기에 와 있었다. 어는 휘영청 달밝은 밤 거리를 걸어 내려가다가 어떤 큼지막한 건물 앞을 막 지나려 하는데 한 여자 사원이 혼자서 전보쪽지를 손에 쥐고서 구슬피 울고 있었다. 달빛은 땅위를 더 없이 밝게 비추고 미풍은 간간이 불어오는데 그녀의 슬퍼하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다시 걸어나갔다. 그러면서 그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녀에게 육신의 병이 있다면 의사한테 가서 치료를 받아야만 하지 않을까? 만약 그녀가 나를 보고서 내가 누군지를 알았다면 “선생님은 목사님이시지요?나는 지금 슬픔에 복받쳐 울고 있어요. 내 눈에 눈물 좀 씻어주셔요”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와서 이러한 종류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내가 신문,라디오,T.V.방송을 통해서 인간의 슬픔이나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수많은 편지가 날아오며 전화통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때마다 전파자는 무릎을 끓고 자기의 지혜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다.

마이애미에 있던 그 여인이 나에게 찾아와서 상담을 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고통이란 죄의 결과이지요.선생님은 바르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께서 벌을 주고 계십니다. 무릎을 끓으시고 하나님께 회개의 기도를 올리십시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하나님의 용서가 임함으로 고통이 물러가고 마음의 노래가 되살아 나는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것은 정답이 못된다.

나는 또한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선생님의 고통은 오직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른 데로 돌린다면 그렇게 슬프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일어나서 해변을 거닐며 달을 바라보셔요. 잔잔히 흐르는 파도 소리를 들어 보셔요.” 때로는 그게 정답이다. 우리는 어떤 조그마한 문제를 갖고 너무 깊이 상심한 나머지 사실보다 더 악화되는 경우를 종종 바라 본다. 그러나 이러한 처방도 언제나 정답은 될 수 없다. 고통은 보다 리얼하다. 누군가가 몇 줄의 시를 남겨 놓았다.
“고통이 사실이 아니라 하지만 바늘을 세우고 그 위에 앉아보렴. 그것이 네 살을 찔러서 피를 낼 때 아파서 싫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통이란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이지요.당신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 어린 소녀가 길가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다. 꼬마는 엄마에게 ” 이 세상이 온통 방석이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이 세상은 방석이 아니기에 이따금씩 넘어져서 다친다.

나는 그 여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리라.”고난이란 선생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찬 바람 북풍이 자작나무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게 하는 것처럼 선생님께 당하는 고난은 영혼에 활력을 주며 인생을 보다 성숙케 합니다.”
그녀가 나에게 상담했다면 나는 아프리카 원시족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믿기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선과 행복을 주려고 하지만 하나님에게 좀 모자란 친구가 있어 하나님의 계획을 좌절시키고 방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마귀가 있어 많은 고통을 인간에게 준다고 믿지만 그것 역시 정답은 못된다.
그러면 정답은 무엇인가?
그 여인이 나에게, 처음부터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먼저 밖에 나가 실컷울어버리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결코 슬퍼해 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울 수 있는 동물로 만드셨으며, 눈물은 정상적인 인간의 일부분이다. 인간 내부에서 슬픔을 억제하는 일은 잘못이다. 그러나 나는 그 여인에게 울음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아니므로 그만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할 것이다.

나는 그 여인이 흘리는 눈물의 원인을 알고 싶다. 아마도 그녀는 외로왔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으나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홀로 지내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 못이겨 슬퍼한다. 아마도 그녀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휴가 때를 위하여 1년 내내 저축한 돈을 갖고 왔으나 생각했던 것보다 값이 엄청나게 비싸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그녀는 매우 사랑했던 누군가가 죽었음을 알리는 전보를 이제 막 받고서 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결혼에 문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녀는 장래 아무 소망도 없이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건간에 나는 그녀에게 그 문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녀를 도와주고 싶을 따름이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절망은 없다. 모든 문제에 해답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보여 줄 수 있다. 유명한 전령이었던 어니 파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해변에서 생겨났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겨주었다. 전투에서 죽어 넘어진 소년들의 소지품들이 모래에 흩날리고 혹은 파묻혀 있었다. 사진이랑,편지랑 책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한 소년 옆에 키타가 놓여 있었고 또 한 소년 옆에 반쯤 모래에 파묻힌 성경이 한권 보였다. 어니 파일은 그것을 주워들고 길을 재촉한다. 반 마일 쯤 왔을 때 그는 다시 돌아와 그가 성경을 처음 발견했던 그 장소에 와 소년 옆에 그것을 놓았다.

나중에 그가 말하였다. “내가 왜 이 책을 집어들었는지 또 내가 왜 되돌아 갔는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그는 성경을 그 소년의 보모에게 보내어서 그들이 위로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되돌아갔던 것은 그 소년이 성경을 갖고 있다가 죽었기에 성경책은 영원히 소년과 함께 있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이러한 체험은 이 사람이 성경을 인간생명의 해답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이 여인에게 나는 성경을 읽어 주었으리라.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니라.”(계21:4) 그렇지 않으면 이 성경을 읽어 주었으리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14:1)
그러나 나는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 이 여인에게 시편 28:7을 읽어 주었을 것이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창조주이시며 무한하신 인격적 존재자가 계시고,그리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고,능력으로 세계를 붙드시고, 그의 자녀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아시는 분이심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은 나의 힘이시니” 그분은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난다 해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분이시다.

어느날 나는 켄퍼노키 늪지대 위를 비행하였다. 저지대로 내려오니까 물 위에 푸르스름한 보기 추한 더껑이가 보였다. 거기에는 더럽고 불결해서 인체를 해치는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을 것이다. 한 때 그 늪지대의 물은 높은 산에서 흘러 나오는 깨끗하고 맑은 물이었다. 그러나 저지대에서 흐르는 것을 멈추기 때문에 부패하고 만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 당신이 저지대에 살면서 멈추면 생애도 부패하기 시작한다. 때때로 당신의 눈물이 눈을 흐르게 함으로 앞길을 바라볼 수 없게 할 때에도 전진은 계속해야 한다. 의사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여러가지 목적을 위해서 두뇌의 여러 부분을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사람이 걱정하거나 상심할 때면 윗 부분의 두뇌 세포를 사용한다. 두려움도 마찬가지, 윗 부분에서 이루어진다. 아랫부분 두뇌 세포는 육체의 근육활동을 작동시킨다. 활동을 하고 있을 때면 일상생활에서 쌓인 긴장이 윗 부분 두뇌 세포에서 풀어지며 이들이 정상적으로 기능을 다하게 한다.

뉴 잉글랜드에서 한 사람이 마음에 큰 슬픔과 고통 가운데 처해 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로 와서 “밖에 나가 꿀벌에게 고통을 말해 보셔요”라고 말했다. 저것은 참으로 좋은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벌처럼 부지런하라”고 한다.
사람이 쉬지 않고 일하는 꿀벌을 바라보노라면 아래쪽 두뇌 세포가 작동하는 자극을 받으며 마음을 상심케 하는 긴장도 풀어진다. 당신이 상심하여 눈물을 흘릴 때 먼저 생각나는 것은, 침대로 가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 맘속에 하나님이 계셔 그의 믿음을 활용하면 그 능력이 당신에게 흘러 넘쳐 현실 가운데 역사한다. 이렇게 계속해 나가노라면 마음 속에 고통도 이길 수 있게 된다.
시편 기자는 ” 내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니… 내가 노래하여 그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했다. 최근에 유행되는 대중가요 “빗속을 거닐면서”라는 노래가 있다. 수년 전에 유행되었던 대중가요 중에 “빗속에서 노래하며”라는 게 있다. 이들 두 노래는 장단이 맞는다. 당신 앞길에 비가 내리고 모든 것이 어둡고 침울해도 걷기를 계속하며 멈추지 말라. 걸을 때 노래가 나온다. 우리는 내리는 비를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의 능력을 가짐으로써 빗속에서도 노래부를 수 있으리라.
“내 마음이 심히도 기뻐하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상심이 비통과 분개와 자기 연민에 빠지게 하면 그러한 때 인간은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늪과 같이 되어 버린다. 그러한 때 얼굴을 찌푸리고 싶고, 불평하고 싶은 곳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마음 속에 생겨나는 노래가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할 것이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

커팅맨 뽁뽁이 커팅기 절단기

동일한 제품의 포장을 할 때는 뽁뽁이(에어캡),종이,비닐 여러 종류의 재질을 대량으로 동일하게 절단해야 되는 경우가 있다.
뽁뽁이를 이용하여 대량의 제품을 포장할 때 뽁뽁이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의 문제가 있는데 뽁뽁이 절단기를 이용하면 쉽고 빠르게 절단하고 포장을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뽁뽁이 절단기에 사용되는 클램프를 포장하기 위해 뽁뽁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보자.

위와 같이 뽁뽁이 커팅기에 사용될 클램프를 다량으로 조립해서 뽁뽁이로 포장해야 될 경우 여러장의 뽁뽁이를 정확한 길이로 여러 장을 잘라야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클램프를 포장할 대략적인 사이즈를 알기 위해 클램프를 올려놓고 자를 위치를 선정하여 테이프로 마킹을 먼저한다.
그래야 대략적인 절단 길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는 길이로 뽁뽁이를 커팅맨 뽁뽁이 커팅기를 이용하여 원하는 수량 만큼 잘라주면 된다.
그리고 그 잘라진 뽁뽁이를 이용하여 클램프를 포장하면 여러 개의 동일한 사이즈의 클램프를 쉽게 포장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의 포장 상태를 보여준다.
커팅맨 뽁뽁이 커팅기를 유용하게 사용하여 보자.

*** 뽁뽁이 커팅기의 장점을 살펴보면
(1) 원하는 크기의 뽁뽁이를 다량으로 자를 수가 있다.
(2) 책상에 탈부착을 쉽게 할 수 있어 공간 활용이 원활하다.
(3) 별도 고무판이나 부가적인 것이 필요없다.
(4) 책상에 흠집이 나지 않아 항상 깨끗한 책상을 사용할 수 있다.
(5) 뽁뽁이를 거치하여 거추장스러운 거치대가 필요없다.
(6) 뽁뽁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원가 절감을 할 수 있다.
짜투리 또한 사용이 가능하다.
(7) 제품이 견고하다.
(8) 고장 염려가 없다. 필요한 부품은 별도 구매하여 사용할 수 있다.
(9) 품질 대비 가격이 저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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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마음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신비스러운 것 중의 하나는 고통의 문제이다.”어찌하여 이것이 나에게 왔단 말인가?” 우리는 수없이 되풀이하여 묻고 있다. 왜 육신의 질병이? 왜 불구자가? 왜 저 사람이 죽었는가? 내가 왜 실패를 맛보아야 하는가? 우리의 육체에,우리의 정신에,우리의 심령에 고통은 가지가지로 산적해 있다. 왜 그것이 그러한 식으로 찾아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다음의 여러가지 적극적인 면모를 살펴본다면 인생의 고통의 문제를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

(1) 모든 종류의 축복은 고통을 동반한다. 한 실예를 들어보자. 나는 아이들에게 주기 위해 로울러 스케이트를 몇 개 샀다. 나는 스케이팅을 하면서 기쁨을 만끽했으며 어린이들에게도 즐기게 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스케이팅을 할 때 넘어져서 다칠 위험도 다분히 도사리고 있다.

나는 그들이 스케이트를 타려고 하기 전에 먼저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딱딱한 콘크리이트 바닥에 넘어져서 다치고 울곤 하였다. 그러한 예에서 내가 그들에게 고통을 주었다고 당신은 말하겠는가?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그렇게 했다. 그러나 내가 그들에게 스케이트를 줌으로써 그들의 일과에 기쁨과 즐거움의 가능성을 증가시켜 주었다. 그들에게 스케이트를 줌으로써 다칠 것을 허용하였지만 그것이 나의 본 뜻이 아니었다. 내가 만약 밖에 나가서 콘크리트 바닥에 그들의 머리를 쥐어 박았다면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한 소년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비록 그의 아버지가 차를 몰도록 허용은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죽이려고 의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는 일이 허다하니 나는 너에게 차를 운전하거나 차 타는 일을 금지하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소년에게 교통의 유익한 편리한 점을 들어 운전을 허용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하여 놀라운 것들을 주신다. 사랑이란 것을 예로 들어보자. 사랑은 인생에 있어 최대의 축복이지만 그것은 또한 인생 최대의 고통을 가져다 준다. 하나님은 남녀에게 서로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우리 인간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민다. 우리의 가정에 자녀가 태어나면 새로운 사랑이 가슴 속에서 싹튼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자에게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우리 가슴은 찢어질 듯 아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을 위하여 지불해야 하는 대가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꿈꾸고 소망하고 사모하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꿈은 성취되지 못하고 바라는 것은 물거품처럼 되어버리고 야망은 좌절된다. 그때 우리는 절망과 좌절의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된다. 한편 우리는 성취하는 괘감을 맛보기도 한다. 한 사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가능성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어떠한 팀이 경기를 하려고 야구장에 나갔다고 하자. 그들은 최선을 다해 보았으나 패배를 당했고 그것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만약 그 패배로 인한 고통을 피하느라고 경기를 하지 않다면 그들은 패배를 모면할 수 있을런지 모르지만 아울러 이길 기회도 놓치고 마는 것이다. 사람이 경기를 한다면 이길 가능성과 질 가능성을 동시에 인정해야 한다.

인생을 연구해 보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짝을 이루고 있음을 알 것이다. 선과 악, 길고 짦음, 강하고 약함,뜨거움과 차가움, 흰 것과 검은 것, 기쁨과 슬픔등이 있다. 전자의 존재함은 후자의 가능성을 배재하지 못한다. 고통이 없다면 기쁨도 없을 것이다.

(2) 현생에서의 고통과 슬픔은 우리가 인간세계에 속하기위해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이다. ‘무죄한 자가 왜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이 문제는 우리에게 두고 두고 제기된다.

인간은 이 땅 위에 재판제도를 이루어 놓았다.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있고 어떤 사람이 범죄 사실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면 공정한 재판을 받는다. 범죄 사실이 드러나면 범죄 정도에 상응한 벌을 받는다. 우리는 법정이 무죄한 자에게는 벌주지 않는다는 점을 안다. 그러나 인생에게는 그와 같지 않다.

물론 우리는 죄란 금생과 내세에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한 자들중에는 무죄한 자도 있었다. 이 땅 위에서 아무 죄없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았는데 그들의 아들과 딸이 전전긍긍하므로 그들의 간장은 애가 끓는다. 가장 훌륭한 성도들 중에 고통에 못이겨 병석에 눕는 이가 있다. 가장 성결하게 살았던 이들 중에 낙심천만한 처지에 떨어지는 자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각자 자기가 저지른 정도에 따라서만 고난을 받게 하는 것으로 세상을 이루어 놓으셨다면,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쁨도 제한 받아야만 한다. 당신의 생활 주변을 살펴보라. 그러면 당신은 타인의 수고로 말미암아 누리는 잇점이 얼마나 많은가를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

당신이 병들어 누웠다고 생각해 보자. 당신이 홀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면 의사도 부를 수 없다. 입원할 만한 병원도,간호해줄 간호원도 없다. 뛰어난 전문의가 발명해 낸 약품도 없을 것이다. 당신이 죽어도 묻히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축복을 누린다. 또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많은 고난을 당한다. 가끔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왜 제가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지요?” 대답은 ‘묵묵부답’이었다. 당신은 축복도 받을 자격이 없다. 그것은 인간 누구나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상호간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신비스러운 일을 보았다. 왜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특별히 간섭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시는가? 나는 어떤 사람에게 기도를 해주었더니 감쪽같이 응답이 왔다. 나는 어제 자궁암으로 고생하는 한 부인을 위해 기도했더니 즉각적으로 그 고통은 사라졌으며 그 여자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 때도 별차도가 없었다. 왜 누구에게는 나타나는데 누구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3) 하나님은 우리 생애 가운데 몸과,마음,심령의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도록 역사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두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하였다. “하나님은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시147:3,4) 하나님은 우주의 하나님이시며 또한 인생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여러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때로는 개인적으로 직접 역사하시어 고통을 제거하신다. 때로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위하여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리신다. 당신이 부모라면 자녀가 소아마비에서 고침받기를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위한 기도를 모두 응답하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끔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고통을 제거하심으로써가 아니라 그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써 응답하신다.
나는 한주간 동안 카롤라이나 북부 월밍톤에 있던 적이 있었다. 어느날 오후 해변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거기서 파괴된 장면을 보았다. 오래지 않아 폭풍우가 그 해변을 강타하여 수백채의 가옥을 무너뜨렸다. 그들 중 대부분은 산산 조각이 나 있었으나 그러한 가운데에도 전혀 요동치 않고 서있는 집들이 많이 있었다. 집들 중에 얼마는 값싼 재료로 아무렇게나 지은 집이었으나 얼마나 폭풍우에도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게 지어져 있었다.

인생의 일어나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목적은 인생의 모든 폭풍우를 제거하는 데 있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은 때를 얻고 고난을 모면할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그의 은혜를 인하여 우리도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

스마트 박사는 어린 꼬마 소녀를 의사에게 데리고 온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녀는 자기의 눈꺼풀을 잘라달라고 했다. 의사는 몇 바늘 꿰매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나 어떤 이유로든 마취제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꼬마 소녀에게 바늘을 사용할 때 뛰어 일어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기를 “네,아빠가 제 손을 잡고 있으면 그렇게 할래요.: 그러고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가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꿰매는 바늘 숫자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고통이 경감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그녀의 아빠가 거기에 보이지 않는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이와같은 간단한 실예는 수많은 하나님 자녀들의 체험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손을 잡으시는 강하고 현명하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신다. 아무리 길이 멀고 험해도,어둡고 고통스러워도,눈깜짝하지 않고 고통을 견디며,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잔잔한 평화,빛나는 승리를 발견한다.

당신이 기도한다면? 밥 핏츠 지음 일부 내용 발췌